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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먼데까지 뭐하러 와. 곧 죽을 늙은이에게 뭐 들을 게 있다고.”
3.1 운동에 참여했던 독립투사중 최고령 생존자로 알려진 유정(104) 스님(양평 용수사 주지)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스님의 독립정신을 배우고 싶다며 1시간여 동안 간청을 드리자 스님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니들이 나라잃은 슬픔이 뭔질 알아? 요즘 젊은 것들은 몰라도 너무 몰라.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쯧쯧~.”
유정 스님은 “젊은 친구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며 타박부터 시작했다. 스님은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서 자신보다 한 살 많았던 유관순 열사와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인물. 항일운동 하던 오빠 한 명이 일본인 건물에 불을 지르다가 투옥된 뒤 식구들은 고향인 서울 종로구 적선동을 등지고 일본 경찰을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이 와중에 유정 스님은 친척이 많이 살고 있던 천안으로 숨어들었던 것.
“사람들이 동천 마당에서 난리 났다고 그러더라고. 그 때는 거기(아우내)를 동천이라 불렀거든. 가보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더라구. 내가 그 나이에 무슨 혁명투사나 독립투사였겠어. 아무 것도 모르고 끼게 된 거지”
그러나 겸손이었다. 스님은 분명히 독립투사였다. 독립모임에서 자금책을 맡았다. 아버지가 한약방을 서울에서 운영했던 관계로 비교적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고 나이도 어려서 아버지의 후원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했다.
스님은 “일본 사람들 횡포가 말도 못했지. 순사들이 우리한테 장총을 겨누더니 그냥 막 쏴버리는 거야. 애 어른 할 것 없이 죄다 쏴 죽였어. 사람 목숨이 파리만도 못했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스님은 다행히 일본 경찰에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외모가 닮은 독립군 첩자로 오인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체포 과정에 총탄에 정강이를 맞았고 투옥된 뒤에도 장기간 고문을 받아 온 몸이 만신창이라 할 정도로 허약해졌다.
스무 살 무렵인 1920년대 중반 석방된 스님은 귀국해 금강산 수미암에서 병치료를 하던 중 불가에 귀의했다. 은사는 당시 금강산 지역에서 높은 수행력으로 이름을 날리던 웅필 스님이었다.
이후 8. 15 해방을 맞아 남하했고, 청주지역에서 둥지를 틀다가 천진암 영통사에 자리를 잡았다. 영통사를 창건하고 한때 신도가 3000명이 넘을 정도로 지역 포교를 활성화시키기도 했지만 주변 이교도 단체의 음해와 방해로 6년전 이곳 양평 용수사로 옮겨왔다.
스님은 10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3.1 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게 잡혀가던 유관순 열사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유관순 언니가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만세삼창을 하는데 가슴 쪽 천에는 ‘내나라를 빨리 내놔라’라고 씌어 있었어. 그것을 본 일본 순사들이 ‘저 여자가 주동자다’ 그러면서 잡아갔지….”
“죽어가거나 옥살이 하면서 나라 살리려고 했던 사람은 다 죽었어. 꾀부린 사람만 살아남았지. 그 때 독립 운동했던 투사들은 다들 힘들게 살다가 갔어. 나도 그 분들 사진을 볼 때면 살아있다는 것이 죄스러워. 우리 국민들도 이제부터라도 생각들을 고쳐야 해. 세상이 잘못 됐다고 비아냥거리기만 하면 어떡해. 좋은 세상이 오도록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야지. 안 그래 기자양반?”
스님의 또렷한 음성에는 분명 아직도 과거에 독립만세를 부르던 그 힘찬 기백이 서려 있었다. 스님은 광복절이 다가오자 얼마전에도 독립투사들의 사진을 꺼내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분들만 생각하면 정말 밥도 안넘어가, 얼마나 고초를 많이 겪었는데. 출가 후 매일 부처님께 빌었지. 그분들 극락세계에서 편안히 쉬게 해달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