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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1924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41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월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43년 보현사 강원 대교과를, 45년 서울 대원사강원 수의과를 졸업했다. 50년 해인사 범어사 강원 강사와 속초 신흥사, 태백 흥복사 등 13개 사찰 주지를 거쳐 78년부터 제천 백련사에 주석해왔다.
다음은 올해초 본지에 소개된 담월 스님 취재내용이다.
*“자기 부처에 의지하라”
충북 제천시 감악산 백련사 가는 길.
명암리 마을회관에서부터 계곡을 끼고 오른다. 물 맑은 계곡은 가도가도 끝이 없다. 며칠전 내린 비로 이제 봄소식을 전하려는 듯 생기가 돋은 수풀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힘이 난다.
한참 감상에 젖어 있는데 차가 감악산 밑의 작은 고개를 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다. 가던 길에 문제가 생겼다.
계곡 끝무렵에서부터 시작된 감악산 정상(해발 950m)으로 오르는 길에는 눈이 아직도 녹지 않았다. 차는 더 이상 산으로 오르지 못하고, 길 한쪽에서 멈춰섰다.
급히 달려와 준 ‘우리는선우’ 김연호 제천지부장의 도움으로 산밑 마을에 살고 있는 백련사 신도의 4륜구동차를 빌려타고 절에 오를 수 있었다.
해발 850m 고지의 감악산 백련사. 경내에 도착하여 마루에 앉으니 여러개의 봉우리 사이로 윤곽만 보이는 고속도로가 아득하기만 하다.
백련사 조실인 담월(潭月) 스님의 처소로 들어가니 묵향이 코끝을 감싸온다.
큰붓을 들고 한획 한획 써내려가는 스님의 당당한 필치가 시원하다. ‘무심시도(無心是道)’라는 글귀가 보인다. 스님에게 뜻을 여쭈니 ‘번뇌망상 없애는 것이 도’라고 설명한다.
붓글씨를 다 쓴 스님은 한참동안 붓을 씻은 후 포행에 나섰다. 공양주 보살이 손수 짜준 모자를 쓴 스님은 “한 겨울에는 바람이 워낙 거세서 포행을 못했는데 이제 봄이 된 것 같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우수를 지나 경칩이 코앞에 와 있지만 오후 4시 이후부터 아침까지 영하 5~6도를 오르내리는 백련사. 낮에도 춥기는 다반사다.
속초 신흥사, 간성 건봉사, 서울 칠보사등 13개 사찰의 주지를 맡아 중창불사를 한 뒤 모든 것을 버리고 찾아온 이곳. 스님은 1976년 수해로 축대가 무너지고 인법당 한 채만 간신히 남게 되면서 젊은 스님이 떠나버리자 이곳에 들어왔다.
혼자서 산 아래에서부터 시멘트 등 자재를 지게에 짊어지고 산 꼭대기까지 나르고 돌을 쌓아 2년만에 간신히 법당을 지었다.
3월 13일이면 햇수로 30년을 감악산에서 채우게 된다. 그동안 스님은 좀처럼 산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청년불자들의 요청으로 경전법회 법문과 지역민을 위한 경로잔치를 열기 위한 것 빼고는.
스님은 “혼자 촛불켜고 나무해서 밥해 먹으며 수행할 때가 좋았다”고 회상하며 웃음지었다.
스님은 젊은시절 손수 쌓아올린 축대옆을 걸으며 산아래를 응시했다.
“욕심없는 산처럼 살아야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면 괴로움도 없어”라고 말하며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잠시후 스님이 사시불공(巳時佛供)을 위해 가사를 수하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목탁을 치며 천수경부터 정법계진언, 거불(擧佛)·보소청진언(普召請眞言)·유치(由致)·청사(請詞), 향화청(香花請), 가영(歌詠)등의 순으로 청(請)을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음의 고저가 분명한 스님의 청을 듣고 있으니 웬지 엄숙해진다. 추녀끝에서 가끔씩 울리는 풍경소리가 조화롭다.
공양후 스님은 다시 법당으로 가서 1시간 동안 꼬박 정토발원 염불을 한 후 붓을 들었다.
처세간여허공(處世間如虛空)
여연화불착수(如蓮華不着水)
심청정초어피(心淸靜超於彼)
계수예무상존(稽首禮無上尊)
세간생활하되 허공같이 비워서 걸림없게 하고,
연꽃이 더럽고 깨끗한 물에 젖지 않는 것 같이 하라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장애되거나 구애받지 않으니,
자기의 부처에게 의지하라.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글귀이다. 스님은 마음의 근본을 밝히고 성품의 근원을 찾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의 주장자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천지만물이 마음으로 좇아 성립되고 소멸되는 것이니 청정본연한 마음만 깨닫게 되면 우주와 인생의 근본진리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인류의 지상과제도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스님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바로알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30년간 매년 백련사를 찾아 100일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해덕화 보살(80세)은 “항상 변함없이 올곧은 스님의 모습이 좋다”며 “평생을 수행에만 전념하신 스님께 법문을 들은 것이 무엇보다 큰 복”이라고 말했다.
* 담월 스님의 가르침
‘세상이 허무하고 인생이 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나도 젊어서부터 세상이 무상하고 허망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했어요. 이제 속세에서의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인생의 허망함과 무상함이 새삼 피부로 느껴집니다.
‘만유(萬有) 현상계(現象界)는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실상(實相,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이 아니라고 한다면 가고 옴이 없는 여래의 참모습을 보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라만상을 실상이 아닌 환한 공상(空相, 모든 것이 공(空)인 그 모습)으로 보면 집착심이 생기지 않고, 집착심이 없으면 욕심이 생기지 않고, 욕심이 없으면 죄악이 생기지 않아 육근(六根, 눈·귀·코·혀·몸·생각)이 청정하게 됩니다. 육근이 청정하면 저절로 육신이 밝아져서 거래와 생멸이 없는 여래의 경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꿈을 객이 해몽하고, 객의 꿈을 주인이 풀이하지만 지금 꿈을 얘기하는 두 사람도 역시 꿈속의 사람’이라는 도인의 말과 같이 세상은 허망한 것입니다.
좋고 궂은 일만사가 현재라는 시점에서 0.1초만 지나도 꿈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란 지나간 꿈이요, 현재란 흘러가는 꿈이요, 미래란 다가오는 꿈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한방울의 물거품과 같이 허망한 것입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태양과 별이 있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설명할 때 33천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로 설명합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초속 100㎞로 달릴 수 있는 로케트가 지구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켄타우로스자리의 ‘프록시마’라는 별까지 가는데 1만5000만년이나 걸리는 광대무변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삼천대천세계 아래로 42억 항하사 세계를 지나 내려가면 인간이 살고 있는 오탁악세 곧 지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구는 수천억개의 별중에 잠깐 쉬어가는 작은 별입니다.
180억년 우주의 기원중 지구는 45억세가 된다고 하니 이 무한한 시간속에 인생 70세는 ‘찰나’의 시간일 뿐입니다.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천자의 호걸은 하루살이와 같다’고 한 서산대사의 말과 같이 인생이란 공상에서 내려다보면 다락논 한떼기에 좁쌀 한통 심어놓고 대지가 타는날 동전 한푼에 습기로 목을 축이려다 황토밭에 고꾸라지는 꿈속의 꼭두각시와 같고, 한 마리의 토룡(土龍, 지렁이)입니다.
<원각경>에 ‘일체중생은 음욕으로 생겨서 애욕으로 유전한다’고 했으나 무슨일로 와서 부유같은 인생을 살다가 무슨 까닭으로 영원한 죽음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허망하기 그지없는 인생입니다. 목적없이 와서 지각없이 살다가 거처없이 사라지는 허망한 인생입니다.
‘얼마나 살기위해 낮밤을 헛보내고 허송세월 하는가’라는 원효대사의 말씀이 귓전을 후려칩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기에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답다는 것은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는 모두 참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사람이 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믿으면 완전하고 고통없는 경지, 곧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과를 믿어야 합니다.
마음을 뺏겨 무리에 휩쓸리고 인과를 지으면 아무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보았자 헛 일입니다. 설사 백천겁을 지날지라도 지은 죄업은 없어지지 않고 언제든지 과보를 어김없이 받게되는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인과를 믿는 일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인과를 믿으면 겸허한 생활인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참사람은 또 도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100년을 살면서 도를 알지 못하는 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도를 아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가 땅을 짚고 일어납니다. 땅이 사람보고 넘어지라고 해서 넘어진 것이 아니고, 일어서라고 해서 일어선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일어난 것은 사람이 한 일이지 땅과 관련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도를 배우는 것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도로 인해 깨닫는 것입니다. 위하는 것도 도요, 깨닫는 것도 도입니다. 도가 사람에게 깨달으라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깨달을 것입니까? 금생에 자기의 본성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주의 대도와 진리가 다 마음에 있습니다. 열심히 마음공부 해야 합니다.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자기의 본성을 스스로 등져버리고 누구를 위해 전전하며 종노릇하고 있는 가를 철저하게 느껴보십시요.
우리는 도 속에 살면서도 도를 모릅니다. 우리가 눈으로 눈썹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너무 도 속에 살아서, 가까워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거수 일투족 하는 것이 전부다 도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전부 도의 작용입니다.
상(相)에만 집착하고 진리를 모르면 얼굴을 마주 대해도 천리같이 막히고, 마음을 비우고 도를 알면 천지가 한 집처럼 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과 글에 의지해서 마음과 힘을 허비하지만 깨닫고자 하는 주체적인 노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마음밖의 마음을 전하는 깨달음의 비결은 자기의 마음으로 스스로 닦는 것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뭐든지 뒤로 미뤄서는 수행을 못합니다. 젊었다고 생사를 장담 못하고, 건강하다고 생사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젊어서 건강할 때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