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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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응 보우, 환성 지안 스님을 아십니까?
제주 평화통일불사리탑, 석상제막...법화경 사경 봉안도
허응당 보우스님
조선시대 쓰려져 가던 불교를 일으켜 세우려고 목숨까지 바친 허응 보우 스님과 환성 지안 스님을 아십니까?

허응 보우(1509~1565) 스님은 조선의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폐지되었던 선교 양종과 승과제도를 부활시켰으며, 환성 지안(1664~1729) 스님은 화엄의 대강백으로서 화엄대법회를 개설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대중화했었다.

하지만 두 스님은 유생들의 박해로 제주도 조천까지 유배되어 돌과 몽둥이로 맞아 통한의 죽음을 맞이하였고, 나라를 어지럽힌 요승(妖僧)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남아 있다.

제주도 조천에 자리잡고 있는 조계종 직할교구 평화통일불사리탑에 호국불교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허응 보우․환성지안 스님 석상이 제막된다.

제주 평화통일불사리탑과 서울 법화정사 회주인 도림 스님의 원력으로 8월 16일 10시부터 5000여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건립되는 두 스님의 석상은 3m 높이로 조성된다. 석상의 모양은 오른손에는 중생을 깨우치는 육환장(六環丈)과 왼손에는 바른 법을 지켜나가는 팔만대장경을 쥔 모습을 형상화했다.

환성 지안스님
도림 스님은 1991년 보우 스님과 지안 스님이 순교한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부지 400평을 마련해 조천동산을 조성한 뒤 두 스님의 순교비를 건립했었다. 또 1992년 평화통일불사리탑 부설 보우사상연구소를 설립해 2005년 일본 천리대학에 보관된 보우대사 시문집인 <허응당집>을 번역해 보우 스님을 재조명하기도 하였다.

도림 스님은 “목숨을 바쳐 바른 법을 지켜나가며 국민 정신의 계도를 위해 애쓰셨던 두 스님의 석상제막식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약해지고, 가치관이 혼란스런 이때에 애국정신의 고취와 세계의 중심이 되는 나라의 앞날을 발원하며 이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평화통일불사리탑은 두 스님의 석상 제막식과 함께 호국을 기원하는 법화경 독송기도, 법화경 사경봉안식도 거행한다. 지난 2006년 10월 15일에는 임진각 평화누리에 3만여 불자가 모여 평화기원 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20년 동안 매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불자들이 정성껏 손으로 써온 법화경 사경을 탑에 모시는 행사를 하고 있는 평화통일불사리탑은 올해에도 불자들이 사경한 1만5000여권의 법화경을 봉안할 예정이다. (02)333-9586

tip-허응당 보우 대선사
신라와 고려의 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웠고, 민족 문화를 창출했던 불교정신이 조선에 들어와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캄캄한 암흑기에 접어들어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 같고,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의 난파선처럼 표류하고 있을 때 나타나신 위대한 스승이 계셨으니 그가 바로 허응당 보우 대선사이시다.
대사는 조선 중종 4년인 1509년에 태어나셨으나,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 그의 성씨가 무엇이며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언제 어느 절에서 어느 스승을 모시고 출가하게 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이나 근거를 알 수 없다.
다만 대사께서 순교하신 후에 제자와 뜻있는 스님들이 대사께서 생전에 남기신 시와 글을 모아 편찬한 허응당집과 나암잡저가 있고, 조선왕조실록 명종조에 관계된 얼마간의 기사를 볼 수 있을 뿐 이다.
대사께서는 금강산 마하연에서 15세에 삭발수계하고 스님이 되신 뒤에 경기도 용문사에서 23세까지 불교경전과 유교경전을 널리 섭렵하셨고, 24세 무렵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35세가 될 때까지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수행에 전념하셨다.
그러나 이때가 불교 탄압이 극에 달해 유생과 관리들이 전국 각지의 사찰, 법당에 불을 지르고 불상과 탱화를 파괴하고 스님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갖은 고문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신명을 건 7년간의 용맹정진을 다시 하셨으며, 이후 양주 회암사에서 문정대비를 만나신 인연으로 19년간의 불교 중흥의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성종의 능찰인 삼성동 봉은사 주지가 되신 후 명종 5년 12월에 문정대비께 아뢰어 연산군 이래 50여년간 폐지되었던 선교양종을 부활시켰고, 아울러 고려 이후 중단된 승과고시를 부활시켜 수차례의 시험을 통해 5,000여 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주어 신분을 보장받게 하였으며, 3년마다 승과를 통해 보우대사께서 제주도에 유배되기 전까지 5회에 걸쳐 150여 명의 인재를 발굴하셨으니,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그중의 인물들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등용된 서산대사로 하여금 부처님 정법안장을 이어 종풍을 계승케 하였으며, 사명대사로 하여금 임진왜란의 풍전등화 앞에선 국가와 백성을 지키게 하였고, 전국의 스님들이 한 손에 불경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들고 기풍당당하게 일어나 나라를 지켰으니 보우대사의 사상과 발자취는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명종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태평을 위해 보우대사와 문정대비는 양주 회암사의 재건을 계획하였고, 명종 20년 4월 5일에 회암사에서 낙성식을 겸한 무차법회를 성대히 열었으나 법회가 끝난 이틀 뒤에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났고, 대비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보우대사를 죽이라는 수없이 많은 상소가 올라오자 명종은 보우대사의 승직을 박탈하고 서울 근처의 사찰 출입을 금하게 하였지만, 미온적인 처사라고 판단한 전국의 유생들이 떼를 지어 보우대사를 죽일 것을 상소했고 성균관의 유생들도 동맹휴학하기에 이르러, 명종은 이와 같은 완강한 요구를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자 보우대사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으니, 이때가 명종 20년 6월 11일이었으며, 외로운 섬 제주도 조천 땅 연북정에서 제주목사 변협이 한 시대의 선각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슬픈 만행을 저질렀으니, 명종 20년 9월, 대사의 나이 56세이었다.
보우대사가 순교한 다음 해인 명종 21년에 불교교단의 선교양종과 승과 도첩제도가 모두 폐지되었고, 승단과 스님들의 위치는 예전의 핍박받던 그 시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는 보우대사가 문정대비를 만나 불교중흥의 기치를 들고 피눈물을 흘리며 순교하기까지 19년의 세월이었다.
제자 사명은 스승인 보우대사 영전에 다음과 같은 예찬의 글을 올렸다.
‘생각컨대 우리 스승 보우대사께서 동방의 한쪽 좁은 땅에 태어나 백세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의 문을 활짝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의지하여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시고, 이 도로 하여금 마침내 사라지고 끊어지지 않게 하시었으니 이 분이 아니었더라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법안장이 거의 사라지고 들리지 않을 뻔 하였다. 이를 논하건대 가히 천고에 홀로 왔다 가신 거룩한 분이라 하겠다. 보우대사의 품성은 옛과 지금에 홀로 뛰어나고, 도는 충만하여 높은 지조를 홀로 행하며, 인ㆍ의ㆍ도ㆍ덕이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감히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역시 지극하신 분이 아니겠는가. 아! 이 글을 비록 전하나 만일 그 뜻을 알 수 있는 이가 아니면 누가 보우대사의 고귀한 뜻을 알겠는가.’
평화통일불사리탑사의 회주이신 도림스님께서 1991년 9월 10일 부지 4천평을 마련하고 전국의 불자님들에게 호소하여 보우대사께서 순교하신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조천동산에 보우대사의 순교비를 건립하였고, 오늘 이제 보우대사의 석상을 조성하여 그 자리에 모시고 제막식을 봉행하고자하니, 불자들이여! 보우대사의 큰 뜻을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 이 땅에 영원히 펼쳐 나갈지어다.


tip-환성당 지안 대종사
한 마음이 집중되어 뭉쳐진 힘은 너무나 순수하기에 언어나 모양을 가지고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과 인연이 깊어 나쁜 버릇을 멀리 하고 믿음을 바로 세우게 하셨으며 정법을 쇄신케 하신 분이 계셨으니 바로 환성당 지안 대종사이시다.
지안대사의 고향은 춘천으로 속성은 정씨이며, 조선 현종 5년인 1664년 6월 10일에 탄생하셨다. 어릴 적에는 영특하고 기상이 남달랐으며, 15세에 출가하여 미지산 용문사에서 상봉정원대사를 스승으로 삼고, 17세에 참선 공부하여 월담설제화상에게 법을 받으니 서산대사의 5대 적손이 되신다. 지안대사께서는 골상이 청엄하시고 음정이 우람하시어 말을 주고받는 상대에게 신비감을 안겨주며, 말씀에 조리가 분명하고 군말이 전혀 없어 간결하고 화통하였다.
27세 때에 구도행각을 떠나 김천 직지사에 들러 모운진언대사의 화엄경 대법회에 참석했는데, 모운진언대사는 지안스님을 겪어 보고는 그 재주와 인품에 놀라워하더니, 하루는 대중에게 당신의 법자리를 지안스님에게 물려주노라하여 강석을 물려받은 지안대사는 종횡무진한 설법과 유현미묘한 강론을 통해, 당시 선을 말하고 교를 통하는 법사들이 모두 지안대사의 풍격을 따르니 사방의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지안대사께서는 일생동안 절을 맡아 거처를 정하고 자리를 잡고 앉으신 일 없이 늘 운수행각을 하시니 언제나 편안한 모습으로 천지간에 한바탕 한가로운 삶을 영위하는 분이셨다.
해남 대둔사에 계실 때 부처님께 마지를 올리려 하는데 공중에서 세 차례나 ‘지안’이라 부르는 소리가 나거늘 지안대사께서도 세 차례를 응락한 일이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법호를 부를 환자를 써서 ‘환성’이라 하였으며, 큰스님께서 나타나 한마디 시를 주시되 “수미산을 짊어지고 바다를 건너가네 법보시의 문을 열되 풀 속으로 가라” 하시니 이것은 불법을 양어깨에 메고 중생을 널리 교화하라는 뜻이라 하다.
영조 1년인 1725년에 김제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개설하니 청법 대중이 무려 1,400여 인이나 모이므로 높은 법단에 올라가 불자를 세우고 법문을 하시니 그 우렁찬 원음이 낭랑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기쁨을 느끼고 이익을 얻어 받들어 행하며, 이것은 마치 영산회상과도 같고 기원정사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수천군중이 모여 법회를 가졌던 일로 조정의 유생들이 놀라 긴장하였고 여기에 음해를 꾸며 상소하는 자가 수백에 이르러, 마침내 영조 5년 가을에 구속되어 호남의 감옥에 갇혔다가 무죄라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유죄를 만들어 제주도에 유배시켰으며, 유배되신지 7일만인 칠월 칠석날에 입적하셨으니, 세수는 66세요, 법납은 51세이셨다.
지안대사의 고난은 불교 탄압의 상징이요, 스님의 입멸은 국가의 손실임을 시사한 듯 3일동안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들끓었으며, 영결식을 거행하는 날 저녁에 하늘에서 무지개가 뻗치고 땅에서 서기가 솟으며 빛을 발하는 일이 나타나니,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면서 ''성자가 입적하셨다''고 외쳤다고 한다.
김원우 기자 | wwkim@buddhapia.com
2007-07-12 오전 2: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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