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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 해결책 불교에서 찾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제1차 불교사회복지 학술포럼
조계종사회복지재단(대표이사 지관) 불교사회복지연구소가 6월 2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5차 학술포럼. 사진=박재완 기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구호도,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던 덕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돼 버렸다. 육아와 교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사회 시스템은 출산율 1.08명이라는 최저 수치를 낳았고, 평균수명의 증가로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전체의 9.1%에 달하는 고령사회가 됐다.(이상 통계청 2005년 발표자료) 하지만 ‘정책’과 ‘수치’만으로 사태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인식’이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대표이사 지관) 불교사회복지연구소가 6월 2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5차 학술포럼의 주제를 ‘저출산ㆍ고령 사회에 대비한 불교적 방안 모색’으로 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날 포럼에서는 불교적 관점의 생명관과 가족과, 노년관, 죽음관을 조망해 봄으로써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주제 발표 요지를 정리해 싣는다.

▷불교적 출산관-고영섭 교수(동국대 불교학과)
‘희망’과 ‘행복’의 상징이었던 출산이 ‘부담’과 ‘기피’의 대상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저출산 문제는 단지 제도적 장치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불교적인 해법은 임신 중절 감소와 출산 증가에 대한 계몽과 교육으로 모아진다.

불교에서는 모든 개체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 하나도 귀중하지 않은 생명체는 없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깨달은 존재(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불교는 가정을 새로운 생명(불성)의 탄생처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체들이 이루어내는 생명공동체인 가정은 그 어떤 곳보다 귀중한 공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낳는 것이 새로운 고통의 수레바퀴에 진입시키는 것이라는 관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지난 생(生) 이래의 윤회를 마감하고 금생에 새로운 깨달음을 이룰 불성을 지닌 존재를 키워낸다는 점에서 본다면 출산은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 때문에 출산의 조절은 깨달음을 얻은 새로운 붓다의 탄생을 가로막는 것이 된다. 새로운 생명의 출산은 단지 내 아이를 낳는 소승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의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출산 장려와 입양 권장은 개인의 힘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정부의 출산과 입양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우선되어야 한다. 불교계에서도 임신중절을 최소화하기 위해 생명 존중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세계 최고 임신 중정율과 세계 최저 출산율의 두 기둥을 소통시킬 가능성이 확보될 것이다.

▷불교적 가족관-김일명(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생태학적 환경에서 외부에 있는 체계는 그 안에 체계에 영향을 미치고, 모든 체계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미친다. ‘가족생태계’에서는 가족이 그 중심에 놓여 가족 발달과 변화에 영향을 미치므로 가족에 대한 불교적 시각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부인과 남편의 관계를 같은 종교의 길을 가는 동반자, 즉 도반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부부의 도반관을 근간으로 평등과 화목을 가족의 중심 가치관으로 삼는다. 한 집에 산다는 것은 물리적 거주의 공간뿐만 아니라 마음을 청정히 하고 보시를 베풀고 지혜를 닦아가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포한다. 돌봄과 베품의 의미체로서 가족의 위치를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연보다는 ‘인연’이라는 큰 틀을 제시하고 있는 불교의 가족패러다임은 다양성과 개방성의 추구를 통해 가족에서의 다문화적 틀을 수용하는 가치체계를 제공한다. 이러한 조화와 평등의 가치관은 저출산 고령화로 야기된 ‘돌봄’의 부재현상에 일침을 가한다. 부부간의 인격적 평등은 의무적 ‘돌봄’이 아니라 자발적 배려를 통한 관계맺기를 함으로써 상호관계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불교계를 중심으로 이 같은 ‘돌봄’의 사회화를 실천하는 작은 지역공동체가 생겨나고 공동육아 방식의 어린이집, 생태주의적 학교, 공동부양협동조합 방식의 데이케어센터 등이 생겨나기를 희망한다.
5차 학술포럼에서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법을 모색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불교적 노년관-신성현(동국대 불교학과)
생명이 있는 것은 생로병상의 괴로움을 피할 수 없다. 그 중 늙음은 태어남에 의해서 생긴 신체적 변화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가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다. 그러나 늙음의 괴로움은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육체가 무상하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자는 육체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괴로움이 덜할 것이고, 내 몸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에 사는 사람은 늙음의 여러 형상들을 보고 자신을 혐오할 것이다.

부처님은 노인을 구호할 때 육체가 겪는 괴로움보다는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해주는 경우에도 그들의 올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 지침을 내려주었다.

또한 부처님은 노년에는 지계와 믿음, 지혜와 공덕으로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며 늙음의 모양에 구애받지 않고 늙음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늙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늙음이라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인간존재의 본연의 모습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청정행을 완성시킴으로써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늙음의 괴로움도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원인을 자각하고 청정행과 팔정도를 실천하여 소멸시킨다면 인간은 마침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죽음관-오진탁(한림대 철학과)
삶을 어떤 식으로 마무리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삶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문화’가 없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죽어 가는 당사자에게 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죽어 가는 사람을 육체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 치료할 뿐, 영적으로 보살피는 의식이 결여되어 외로움에 지치고 압박감과 미몽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된다.

불교의 죽음 이해에서 중요한 용어가 바로 생사윤회와 열반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은 두려움 혹은 절망, 부정, 분노, 슬픔, 삶의 마무리, 순응, 희망, 마음의 여유, 밝은 죽음이라는 단계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을 수용해 순응하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하지만 임종을 앞둔 사람 중에는 마지막까지 죽음을 거부하거나 분노를 표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죽음과 임종에 관한 가르침이 갖추어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불교는 생사불이(生死不二) 즉 삶과 죽음 사이에 조금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삶뿐만 아니라 죽음의 길마저도 어둠을 밝히는 광명으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은 세속적인 성공이나 출세 등을 모색하는 ‘삶의 양’과 관계되는 질문인 반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질문은 삶과 죽음의 의미ㆍ보람ㆍ죽음방식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삶의 질’과 관계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다운 사람의 권리만 생각했을 뿐, 인간다운 존엄한 죽음의 권리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실제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7-06-25 오전 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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