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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잊지 않아야 새 역사 열린다
전국 순회 증언 나선 나눔의집 할머니들
6월 20일 전국 순회 강연회가 열린 전주여고에서 학생들이 강연회에 앞서 위안부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할머니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상은 그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부르지만, 그 세 단어에 담기엔 할머니가 겪은 고통과 아픔은 너무도 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쉼터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원장 원행)에 거주하고 있는 이옥선(81) 할머니.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지 58년 만에 고국을 찾은 이 할머니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부 피해의 실상을 알리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을 것이 생의 마지막 목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할머니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6월 15일부터 26일까지 전국 8개 고등학교에서 열린 순회 증언회에 편치 않은 몸으로도 선뜻 참여하겠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6월 20일 전주여고에서 열린 증언회에 참석한 할머니는 700여 명의 학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증언단에 올랐다. 길을 가다 느닷없이 붙잡혀 중국 연길로 끌려갔던 당시 할머니의 나이 열여섯. 그때 트럭에 함께 타고 있었던 여자아이들도 지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저 학생들과 또래였다. 깊은 한숨을 타고 할머니의 증언이 시작됐다.
나눔의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증언을 하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난 1927년 부산 보수동에서 태어났어요. 6남매의 둘째였는데, 집안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밥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았어요. 15살 무렵에 학교에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우동집 식모로 팔려갔어요. 거기서 다시 울산의 술집에서 일했어요. 그곳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길에서 군인들한테 붙잡혔어요.”

위안부로 강제동원된 뒤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들이 산에 버리고 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2000년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중국 연길에서 40여 년을 생활했다. 때문에 할머니의 우리말은 서툴렀고, 조선족말과 중국말이 섞여 억양은 들쑥날쑥했다. 학생들이 좀 더 귀를 쫑긋 세웠다.

“하염없이 트럭과 기차를 타고 갔는데, 난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어요. 수용소 같은 곳에 갇혀 있다가 비행장 닦는 일도 했어요. 근데 내가 힘도 없고 자꾸 집에 보내달라고 항의하자 연길 서시장 위안소로 보내버렸어요. 나 말고도 여자애 열 명 정도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위안부 생활이 시작된 거지. 너무 수치스럽고 힘들어서 탈출을 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어요. 그러다 번번이 붙잡혀서 엄청 맞았어요. (소매를 걷어 보이며) 팔목에 난 상처도 그때 일본군이 내리친 칼을 팔로 막아서 그래.”
할머니의 증언이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사진=박재완 기자

“어머, 어떡해!” 여학생들의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자 할머니는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보여준다. “이 상처도 다시 도망 못 치게 한다고 발가락을 칼로 찔러서 생긴 거예요.” 수업 시간에 배웠던, 교과서에 기록된 ‘역사’가 바로 눈앞에 있다. 이렇게 현재를 살고 있는 이 역사를 왜 일본은 부정하는 것일까?

할머니의 증언이 이어지는 동안, 학생들 사이에선 서명 용지가 전해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안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 하원에 전해질 서명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한 학생이 묻는다. “왜 우리나라 정부에서 안 하고 미국 국회에서 결의안을 만드는 거지?” 그 마음을 아는지 할머니가 대답한다.

“일본군이 패전 후 우리를 버리고 가서 난 중국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어요. 그러다 결혼도 했는데 임신은 할 수가 없었지. 1999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고 나니 고향 생각이 간절히 나더라고. 그래서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이미 사망신고를 했더군요. 부모님과 형제들은 죽고, 갈 데도 없었는데 다행히 나눔의집에 살게 됐어요. 2001년에야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됐는데, 우리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너무 관심이 없어서 놀랬어요.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 관심을 갖고 증언회도 열어주고 문제 해결하라는 법도 만들려고 하더라구요.”
증언회 후 전주여고 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기부금을 이옥선 할머니에게 전달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할머니의 말씀대로 ‘거짓말’ 같은 증언이 끝나자 학생들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의 지나온 생애와 아픔이 침묵 속에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는 듯 했다. 다음은 학생들과의 문답 시간. 처음엔 할머니의 옛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못내 미안해 질문을 하기가 머뭇거려진다. 하지만 한두 명의 학생이 질문을 시작하자 봇물 터지듯 궁금증이 쏟아졌다.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들이 몇 분이 되십니까?”
“전국에 한 100여 분 있지요. 그동안 많이 돌아가셨어. 살아 있는 사람도 80, 90살이 넘었지. 일본은 우리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위안부 피해자가 임신을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됐나요?”
“내가 있던 곳에선 아이를 낳자마자 데려가서 다른 사람 아이로 입양시켜버렸어요. 그런데 다른 부대에선 아이를 죽이는 경우도 있었데.”
“증언하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이렇게 얼굴 내놓고 다니기 부끄럽지. 하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위안부 피해자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우리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다 죽으면 누가 이 얘기를 하고, 또 누가 믿어주겠어요.”

2시간 동안 진행된 증언회가 끝나고, 전주여고에서 모금한 140여 만 원을 학생회장 조영(19)양이 할머니에게 전달했다. 모금액은 나눔의집에 짓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요양시설 건립에 보태진다. 손녀딸 같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마지막 당부를 한다.

“학교에선 선생님이 부모에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공부 잘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를 튼튼하게 지켜주세요.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로 만들어 주세요.”

전국 학생 서명운동 펼치는 기예지양
민사고 동아리 시나브로


“학생들이 직접 할머니를 만나고 이야기 듣는 기회를 통해 우리 역사를 바르게 알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서명운동을 펼치게 됐습니다.”

민족사관고등학교 동아리 시나브로의 회장을 맡고 있는 기예지(19)양은 6월 15일부터 26일까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전국 8개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증언회와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기양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민사고에서 열린 할머니들의 증언회와 나눔의집 봉사활동을 통해서다. 할머니들의 아픔과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의 심각성을 느낀 몇몇 학생들이 모여 봉사동아리 시나브로를 결성했다. 그 첫 번째 활동으로 이번 전국 고등학교 순회 증언회와 전시회, 서명운동이다. 학생들의 서명은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 하원에 보내질 예정이다.

“증언을 들으며 함께 아파하고 눈물짓는 친구들을 보며 앞으로 더 열심히 위안부 문제를 알려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는 기양은 “시나브로 회원들과 함께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도 참가하겠다”며 많은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전주/글=여수령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7-06-25 오전 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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