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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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거 결제법어] 태고종 종정 혜초 스님
칠전선원 단오선원 해인선원등
결제법어하는 혜초스님

태고총림 선암사 칠전선원을 비롯, 단오선원, 해인선원 등 전국의 태고종 소속 선원들이 5월 31일 일제히 정해년 하안거 결제에 들어갔다.

태고총림 방장이며 태고종 종정인 혜초 스님은 이날 하안거 결제법어를 통해 “달마(達磨)가 서래(西來)하여 수휴척이(手携隻履)하고 일조주장자(一條拄杖子)한 까닭이 무엇인지”를 묻고 “육조고사(六朝古寺)의 조계가풍(曹溪家風)이 날로 쇠미(衰微)하니 조주(趙州)의 삼봉(三棒)이 어디를 향해 가야하느냐”며 수행 기강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일갈했다.

이어 “초석(礎石)을 다시 놓고 기둥을 세워 상량(上樑)을 올리는 흥법불사(興法佛事)를 해야한다”며 “태고(太古)의 법손(法孫)이여, 출가납자(出家衲子)여, 선암(仙巖)의 대중(大衆)이여 각성(覺醒) 또 각성(覺醒)”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은 하안거 결제법어 전문이다.

태고종 종정 혜초스님
<丁亥年夏安居結制>

法語

太古叢林 方丈 慧草


봄인가 했더니 어느새 森林(삼림)이 茂盛(무성)한걸 보니 또 夏安居(하안거) 結制(결제) 기간이 돌아왔습니다.
曹溪山麓(조계산록)에는 百花(백화)가 滿發(만발)하나 蜂蝶(봉접)은 오지 않고 靑綠(청록)이 茂盛(무성)하나 極樂鳥(극락조)의 鳴聲(명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太公(태공)이 낚시를 드리우나 小鮹(소소)하나 올라오지 않으니 水凍(수동)이면 魚難躍(어난약)이요 山寒(산한)이면 花發遲(화발지)하는 까닭입니다.
山中(산중)에 香水海(향수해)의 法悅(법열)을 느끼기는 어렵고 須彌山(수미산)의 高蒼(고창)한 薰氣(훈기)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衡主(형주) 育王山(육왕산)의 弘通禪師(홍통선사)에게 어느 衲子(납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禪師(선사)의 家風(가풍)입니까?”
禪師(선사)가 대답했습니다.
“온몸에 닷푼의 값어치도 없느니라”
衲子(납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禪師(선사)께서는 너무도 가난하십니다. 무엇으로 어떻게 施設(시설, 叢林大衆총림대중을 指導지도하고 이끄는 것)하시겠습니까?”
禪師(선사)가 대답했습니다.
“집안의 形便(형편)대로 따르리니 나로서도 별수 있겠는가?”
叢林大衆(총림대중) 여러분!

達磨(달마)가 西來(서래)하여 手携隻履(수휴척리)하고 一條拄杖子(일조주장자)한 까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六朝古寺(육조고사)의 曹溪家風(조계가풍)이 날로 衰微(쇠미)하니 趙州(조주)의 三棒(삼봉)이 어디를 향해 가야합니까?
礎石(초석)을 다시 놓고 기둥을 세워 上樑(상량)을 올리는 興法佛事(흥법불사)를 해야하겠습니다.

그러나 枯木(고목)은 이미 쓰러지고 娕木(착목)은 아직 幼弱(유약)하여 法柱(법주)가 될만한 나무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大鵬(대붕)은 九萬里(구만리) 長天(장천)을 날아가고 朱雀(주작)만 頭頭喃喃(두두남남)이며 龍盤(용반)은 자취가 없고 虎踞(호거)역시 보이지 않으니 바야흐로 末法時代(말법시대)가 어디 따로 있으리오.

太古(태고)의 法孫(법손)이여, 出家衲子(출가납자)여, 仙巖(선암)의 大衆(대중)이여 覺醒(각성) 또 覺醒(각성)하시오. 생각해보면 莫急(막급)하고 또 莫急(막급)합니다.

人無遠見(인무원견)이면 必有近憂(필유근우)입니다.(사람이 멀리 보는 눈이 없으면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근심이 생긴다)
어떤 스님이 盧山(노산) 歸宗禪師(귀종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大衆(대중)들이 禪師(선사)의 말씀을 듣고자 모두 모였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둘둘(兩兩), 셋셋(三三) 이니라”
“무슨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셋셋(三三), 둘둘(兩兩) 이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兩兩三三(양양삼삼)은 文殊菩薩(문수보살)의 前三三(전삼삼) 後三三(후삼삼)의 이야기와 같은 뜻이거니와 오직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지 않겠는가? 法(법, 眞理진리)을 法(법)이라 말하면 이미 法(법)이 아니듯이 하나가 둘이요 둘 또한 하나인 것을 하나니 둘이니 分別心(분별심)을 내어 무엇에 쓰리오. 分別是非(분별시비)는 執着(집착)의 原因(원인)이며 참법(寂然)을 가로막는 마구니(魔性)입니다.

얼마전에 부처님오신날이 지나갔습니다. 佛子(불자)들 마다 부처님오신 뜻을 기리는 祝賀(축하) 法會(법회)를 奉行(봉행)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佛性(불성)을 四無量心사무량심(慈悲喜捨자비희사)이라고 하였습니다. 佛性(불성)이 四無量心(사무량심)이라면 衆生(중생)의 凡性(범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瀑布(폭포)와 波濤(파도)는 한물(一水)이며, 물과 얼음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本體界(본체계)의 實象(실상)은 把握(파악)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現象界(현상계)의 作況(작황)만 보고 是非分別(시비분별)을 일삼고 있습니다. 오늘에 우리 叢林(총림)의 現實(현실)과 똑같습니다.

叢林大衆(총림대중) 여러분은 今年(금년) 夏安居(하안거) 기간동안 百尺竿頭(백척간두)에 進一步(진일보)하는 切迫(절박)한 心情(심정)으로 모두가 몸을 던져 주춧돌을 다시 세우고 기둥과 대들보를 올려 六朝(육조)의 活人家風(활인가풍)을 되살리는데 勞力(노력)합시다.

哮吼一聲天地靜(효후일성천지정)
울부짖는 한마디에 천지가 고요하고
自然颯颯起淸風(자연삽삽기청풍)
자연이 삽삽하여 맑은 바람 일어나네
山中靑湖投一釣(산중청호투일조)
산중에 푸른호수 낚시줄 드리우니
魚盡滄浪月一鉤(어진창랑월일구)
고기는 하나도 없고 둥근달 하나 걸려나오네
김원우 기자 | wwkim@buddhapia.com
2007-05-31 오후 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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