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왜 이 번뇌 덩어리인 사바세계로 오셨을까? 그것도 당시 인도사회에서 가장 귀한 신분이었던 바라문이 아닌 왕족으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사람들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똑같은 생활을 했다. 결혼하여 아들도 낳지 않았는가?
부처님의 생애를 접하면서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이 부처님의 탄생과 생활이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솔천에서 사바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원력으로 오셨다면 뭔가 좀 달랐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범부 중생의 출생은 업에 따라 끌려왔다가 끌려가기에 업계고신(嶪繫苦身)이라 한다. 부처님의 출생은 뜻하는 대로 태어난다고 하여 수의수생신(隨意受生身)이라 한다. 아무생각 없이 태어난 것과 뭔가 뜻을 가지고 태어난 차이, 상상할 수 없이 큰 차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중생은 업생(業生)이라 하고 부처님은 원생(願生)이라 한다.
부처님의 삶. 바로 원력의 삶이다. 마야 왕비의 꿈에 흰 코끼리로 예시를 하고(도솔래의상)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옮기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친 것(비람강생상)이 바로 원생을 강하게 강조하는 대목이다.
동서남북 네 문을 나가 인간 고통의 적나라한 현장을 목격하는 것(사문유관상)이나 마침내 성을 넘어 출가하는 대목(유성출가상), 설산에서 많은 스승들을 찾아 수행하다가 결국 홀로 보리수 나무아래 앉아 선정에 드는 장면(설산수도상), 선정에 들어 유혹하고 공격하는 온갖 마구니들을 물리치고 ‘연기’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의 큰 진리를 깨치는 순간(수하항마상)까지 부처님의 일생은 범부중생과는 분명 다른 노정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이 범부 중생의 몸으로 왔다가 그 몸을 버리고 위대한 진리를 남겨 놓고 가신 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분명하게 내재된 부처의 씨앗, 불성을 자각하라는 가르침이다. 온 몸으로 일생을 함께하며 가르치신 위대한 교육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뒤 다섯 비구를 찾아가 첫 설법(녹원전법상)을 하면서부터 49년 동안 가르침을 베푸시다가 마침내 육신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는 모습(쌍림열반상)에서도 우리는 위대한 스승의 간절한 가르침을 듣고 읽고 느끼게 된다.
부처님의 생애 중 중요한 대목들을 여덟 가지의 그림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을 팔상도(八相圖)라 한다. 이 팔상도는 상징성과 사실성을 함께 갖지만 부처님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더 없이 좋은 자료다. 2006년 가을 광주 빛고을 아카데미가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을 만나다’를 주제로 종범 월운 지선 지광 수진 통광 성열 원담 스님 등 여덟 분의 스님들이 팔상도의 상징성과 의미를 풀어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빛고을 아카데미 운영위원인 이준엽씨(前 현대불교 취재부장)가 그 때의 법문들을 생생하게 풀어낸 뒤 다시 정리하여 <위대한 버림>이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위대한 버림
이준엽 엮음
빨간우체통/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