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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전산화 통해 본 고려대장경의 역사적 의의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일본 하나조노대학과 함께 남선사 소장 초조대장경 판본을 디지털화 하고 있다.

“1000년의 지혜를 1000년의 미래로”

고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감히 만질 엄두도 못 내고 삼배(三拜)부터 하고 조심스레 펴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간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대장경을 전산화하면서 겪었던 여러 어려운 상황이 스쳐 지나가며 ‘이것이 말로만 듣던 초조대장경이구나’ 하는 감정이 겹쳤으리라 생각된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조성이 발원됐다. 전 세계적으로도 송(宋)의 칙판대장경(勅板大藏經)에 이은 두 번째 대장경 조성 시도다. 칙판대장경은 현재 세계에 20여 축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역사의 기록으로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몽고의 침입으로 판목이 소실된 후에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초조대장경의 판본이나마 실체를 드러낸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일본 남선사 일체경(南禪寺一切經) 중의 일부가 고려본 초조대장경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그 후 국내의 전본(傳本)들이 하나 둘 발견되었다. 현재 조사된 바로는 고려본 초조대장경은 일본의 남선사에 1800여 권, 대마도에 600여 권이 남아있다. 국내에는 성암고서박물관과 호림박물관에 각각 100여 권이 있고 국립중앙박물관, 리움미술관, 삼성출판박물관 등 여러 곳에 100여 권 이상이 소장되어 있다. 현존하는 2800여 권은 초조대장경 전체를 6000여 권으로 봤을 때 반 정도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의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대장경의 조성은 국가적인 호국(護國)의 의미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복을 비는 의미도 있지만,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문화민족의 자존심 같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왕조마다 대장경의 편찬을 시도한다.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은 물론 거란(契丹)이니 서하(西夏), 중화인민공화국의 중화대장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우리나라나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의 말씀은 말에서 말로 전해지다가 문자로 기록되었고 필사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목판인쇄술은 활자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1000여 년 동안 정보를 복제할 수 있는 독특한 기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에서는 대장경이 세 번 만들어졌다. 첫 번째가 초조대장경이고, 두 번째가 의천 스님의 교장(敎藏), 세 번째가 해인사의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다.

대장경을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이라고 한다. 그리고 편제상 정장(正藏)과 속장(續藏)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논소들 중 인도 찬술을 한역(漢譯)한 것은 정장에 편입하고 인도 이외의 나라에서 저술된 것을 속장으로 분류했다.

초조대장경이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의 분류 목록에 따른 정장이라면 고려 교장은 속장의 개념이다. 대각국사 의천 스님은 20여 년 동안 중국, 일본, 우리나라의 제가의 장소 1000여 부 5000여 권을 수집하여 분류 정리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한다. 이와 같이 대규모의 장소를 수집하여 분류ㆍ정리한 일도 처음이지만 이 일은 더 나아가 대장경의 외연(外延)을 넓힌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재조대장경의 보유편이나 그 후 대장경들의 속장으로, 정장과 속장으로 편제화된다.

초조대장경의 저본(底本)이 되는 촉판대장경은 송의 개보 4년(971)에 시작하여 태평흥국 8년(983)에 완성된다. 고려 성종 8년(989)에 승(僧) 여가(如可)를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다시 성종 10년에 한언공(韓彦恭)에 의해 대장경이 수입된다.

초조대장경을 국전본(國前本)과 국후본(國後本)으로 나눈다면, 국전본은 현종조에 수입된 촉판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국후본은 문종 17년(1063)에 들어온 거란대장경을 참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지난 2004년부터 초조대장경의 디지털화를 통한 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다. 초조대장경의 복원은 우리나라에 대장경이 하나 더 생기는 일이다.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초조대장경 복원에 나선 것은 고려대장경이 ‘문화재’나 ‘보물’로서 보존되기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정보’로서 활용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장경을 전산화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가 대장경들 간의 족보 관계다. 송판 대장경을 위시하여 거란판, 금판과의 관계, 초조에서 재조에 이르는 다른 대장경들과의 연결 관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수기 스님의 교정별록(校正別錄)은 확실한 기록이고 좋은 지침서라 생각된다.

남선사 일체경의 성격은 독특하다. 초조대장경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개보판, 송판, 원판과 재조대장경 그리고 다양한 필사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 남선사 소장 초조대장경 판본.

촉판대장경은 송 태조의 칙명(勅命)으로 971~983년의 13년 동안 촉(蜀)의 성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대장경이다. 동선사본은 1080~1112년에 복주의 동선등각원에서 만들어졌고, 개원사본은 1112~1151년 복주의 개원사 판본이다. 사계판은 1132년 왕영종(王永從)의 일족이 발원하여 사계의 원각선원에서 만들었고, 적사판은 1231~1349년에 이르기까지 송 원 양조에 걸쳐 적사의 연성원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보령사판은 원대의 지원 연간에 개판된 것이다. 다양한 판본들을 수집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필사본으로 보충하였다.

필사본은 대부분이 응영(應永) 7년(1400)부터 정장 2년(1429) 사이에 관서(關西) 지방의 사찰에 의해 필사되었지만 고려나 중국에서 필사된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사경된 것 외에 천평 14년(742) 하내국(河內國)에서 서사된 것이나 정우(貞祐) 연간(1210년대)에 중국에서 필사된 것도 있다.

나라(奈良) 시대 사경에는 그 당시의 훈점(訓點)이 기입되어 있고 일본의 고대 국어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고려 초조본에도 11세기 초의 한문의 훈독이 각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남선사 일체경은 선창사의 소장인이 있고 일부에는 천룡사(天龍寺), 영락사(永樂寺), 명주천녕장경(明洲天寧藏經), 심왕부(瀋王府) 등의 많은 소장인이 있다. 선창사인은 수집한 후 일괄 날인된 것으로 보이고, 나머지는 선창사에서 수집하기 전에 보관되었던 소장인들이다. 특히 심왕부인이나 천룡사인은 고려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왕부(瀋王府)인은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심왕으로 봉해지고 연경에 세운 서재인 만권당(萬卷堂)의 소장도서 일부로 보인다. 천룡사는 경주에 있는 절로서 삼국시대에 창건되었으나 신라 말 폐사되었다가 고려 때 중건되어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한 사찰이다. 천룡사라는 이름의 절이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고 경주의 천룡사라는 것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 사경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한국의 천룡사로 추정된다.

남선사의 일체경은 고베의 선창사에 있던 것으로, 경장(慶長) 19년(1614)에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명에 의해 옮긴 것이라고 한다. 선창사에 있는 강호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월암 스님의 제자 무견화상이 스승을 대신하여 중국에 건너가 장경을 수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지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다음 구주의 박다(博多)에 있는 경안(慶安)이라는 스님이 불법(佛法)을 넓혀 사은(師恩)에 보답하고 선창사를 위하여 경을 모았다는 응영 원년(1394)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대마도에 있는 것은 반야부 600권인데 안국사(安國寺) 본의 일부에 고려국 김해부호장 허진수(許珍壽)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희(重熙) 15년(1046)에 인경(印經)한 것이라는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대마도에 전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국내의 전본들에 대해서는 유통본과 일부 복장본으로 추정되지만 하나하나에 대해 좀 더 정밀한 서지학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는 문화관광부의 지원으로 초조대장경의 디지털화 사업을 한ㆍ일공동연구 과제로 진행하고 있다. 국내의 소장처와 남선사의 협조를 얻어 교토 하나조노(花園)대학 국제선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조사 중이다. 일본 내에서도 심도 깊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귀한 자료를 선뜻 공개해준 하나조노대학측의 배려는 한ㆍ일문화교류의 좋은 모델이라고 여겨진다.

대장경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정보는 너무 적다. 해인사의 대장경은 목판이 남아있지만 강화의 대장도감(大藏都監)이나 남해의 분사도감(分司都監)의 기능이나 판각 장소는 물론 서문 밖의 판당이나 해인사로 이운한 경로도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교장의 전모가 알려진 것도 일본에 남아있던 교장총록의 필사에 의해서다.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얼마 없고 중수본이나 복각본까지 합해도 수십 종에 불과하다.

몽고의 난에 의해 소실된 초조대장경이나 교장의 판목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부인사의 위치도 불확실하다. 아마도 우리는 역(逆)으로 추적해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이 때문에 개성에는 한번쯤 가보고 싶었다. 교장도감이 있던 대흥왕사나 왕실의 원찰이었던 현화사의 흔적이라도 보고 싶을 뿐이다.

2011년은 초조대장경의 조성을 발원한 지 1000년이 되는 해다. 의천 스님은 ‘천년의 가르침을 모아 천년의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2011년을 맞는 것은 또 다시 새로운 천년의 꿈을 꿀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한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천년의 지혜를 천년의 미래로’라는 이름으로 고려대장경 천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고려대장경 천년 기념행사가 초조대장경의 복원이나 새로운 통합대장경의 편찬, 대장경의 문화·학술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정보화 사회의 종교나 이념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미래의 새로운 장(場)을 여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장경도량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
종림 스님은
장경도량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은 대장경 전산화를 위해 1994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발족했다. 7년 간의 작업 끝에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디지털화 해 CD로 제작했으며 이 공로로 2000년 행원문화상 특별상을, 2004년 대원상 단체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004년부터 ‘한일공동 초조대장경 디지털DB 구축 및 영인본 출판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종림(장경도량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
2007-05-22 오전 11:01:00
 
한마디
가톨릭교도 조사중이예요^^ 저는 교회를 다니지만 이런면에서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큰의미라는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2009-05-09 오후 9: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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