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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통섭 아닌 것이 없고 통섭인 것도 없다.”
학문간 연구, 지식의 통합 등으로 풀이되는 ‘통섭’이 최근 우리 사회와 학계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통섭이라는 용어의 출처와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아직 불교계 내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지 않고 있다. 그러나 통섭을 단순히 ‘학문의 비빔밥’이나 ‘학문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진리’는 좁은 개념에서 벗어나, ‘학문 간의 통합과 전개’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 개념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불교 핵심 사상인 ‘연기(緣起)’가 통섭의 기본 정신이라고 한다면 모든 불교가 통섭이고, 그 어떤 불교학 연구 분야도 통섭으로 정의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통섭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접목을 시도하는 ‘응용불교’를 통섭의 한 예로 볼 수도 있다. 응용불교학이란 불교의 교리와 관점을 다른 학문과 연계해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생산해내는 연구방법론을 말한다. 여기서는 ‘통섭’의 개념을 학제 간 연구 혹은 학문의 경계를 지운다는 의미로 보고, 불교가 여러 학문들과 어떻게 공통점을 찾고 ‘상생(相生)’의 장을 마련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불교와 과학
불교의 학제 간 연구 중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바로 불교생태학이다. 환경이 전 지구적인 관심사로 떠오름에 따라 불교와 환경, 불교와 생태학 관련 연구가 활발해진 것이다. 오늘날 지구 환경과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을 부처님 가르침에서 찾고자 하는 불교생태학은 다른 학문에 비해 연구논문도 적지 않고, 관련 단체도 운영되고 있다.
불교생태학 연구는 동국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동국대 BK21 불교연구단은 2년째 이 분야 연구를 핵심 연구과제로 선정, 집중 연구를 펼치고 있다.
2004년 창립한 동국대학교 에코포럼은 생태환경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여러 학문분야의 학제적 토론의 장을 추구한다. 에코포럼은 불교적 가치관과 삶의 양식으로 지구의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년간 학술세미나와 포럼을 개최하고, 미국 하버드대와 영국의 런던대 등과 공동학술대회를 열며 불교생태학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불교와 생태학에 관련한 저서로는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펴낸 <불교와 생태학> <현대사회비판과 불교생태학>, 서재영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의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다.
‘과학과 불교’ 역시 꾸준한 연구가 이뤄지는 분야다. 서양에서는 명상이나 선 수행 등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결과물인 <달라이 라마, 과학과 만나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현대 신경과학과 동양 불교사상의 만남> 등은 뇌 과학을 불교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국내에서도 불교와 과학의 접점을 찾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이시우 박사는 천체물리학과 불교의 관계를 살핀 <천문학자와 붓다의 대화>를, 우희종 교수(서울대)는 생명과학과 선(禪) 사상의 공통점을 살핀 <생명과학과 선>을 각각 펴냈다. 카오스 이론과 불교 사상을 연구해 온 김용운 교수는 <카오스와 불교: 불교에서 바라본 과학의 본질과 미래>를 통해 카오스 이론의 특징 중 하나인 프랙털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사상과 일치한다고 주장해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불교와 상담·심리학
“부처님은 위대한 상담가이자 의왕(醫王)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현대인들의 정신적ㆍ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꾸준히 시도돼 왔다.
조계종은 2000년 종단 내에 ‘불교상담개발원’을 설치하고, 불교에 맞는 상담활동과 이론, 기법을 연구ㆍ개발하고 있다. 창립과 함께 매년 현장에서의 상담 경험과 상담 이론 연구 성과를 나누는 ‘불교와 상담 워크숍’을 개최하고 있다.
최근에는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불교와 상담ㆍ심리학 연구를 위한 학회도 잇달아 창립했다. 불교의 수행법과 서양의학인 심리치료를 접목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4월 발족한 한국명상치료학회(회장 인경)와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공동대표 미산)는 불교학자와 정신의학 및 심리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두 단체 모두 정기학술대회와 월례발표회, 논문집 발간 등을 통해 연구 성과를 쌓아갈 예정이다.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 원장(전현수신경정신과)은 “21세기는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과학이 만나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통합의 시대”라며 “동양 정신문화의 정수인 불교와 서양 의학인 심리치료의 접목과 통합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비교종교학
여러 종교의 특성 의의 등을 학문적으로 접근해 비교 연구하는 비교종교학은 기독교 등 서구 종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간 대화’ 역시 넓은 의미의 통섭에 포함시킬 수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교수불자연합회(회장 김용표)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회장 이종오)가 지난해부터 공동학술회의를 개최해, 불교와 기독교의 ‘학문적 대화’의 장을 열고 있다. 첫 학술회의에서 ‘부처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짚어본 두 단체는 올해 ‘해탈과 구원’이라는 주제로 각 종교의 지향점에 대해 학문적 이해를 시도했다.
김용표 교수는 “종교간 대화는 외면적인 협력을 위한 대화와 비교종교학적 이론적 대화, 심층적 영적 대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며 “교수협의회가 학술회의를 개최한 것은 비교종교학적 대화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종교 간의 지적(知的) 이해와 본질 탐색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종오 교수는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는 단순하게 자신의 종교를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각 종교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함께 고민하고 연구해 자기 종교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불교적 ‘통섭’을 위해서는
1980년대 말 학제 간 연구가 학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면서도 불교계에서도 불교생태학, 불교윤리학, 불교여성학 등이 연구 분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간의 연구 성과와 연구 진행 현황을 살펴보면, 학제 간 연구를 위한 인프라가 상당히 부족함을 알 수 있다. 혜주 스님(동국대 불교학과)은 “불교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접목을 시도하는 응용불교학 논문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지만 아직 학자 개인의 관심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며 “불교와 다른 학문과의 연구를 통해 지속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닌 단체나 연구팀 등을 통한 공동연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2002년부터 격년으로 열리고 있는 한국불교학결집대회를 불교학의 연구역량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은 물론 불교와 다른 학제 간의 공동연구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2008년 열리는 제4회 한국불교학결집대회의 대회장을 맡은 이평래 교수(충남대)는 “결집대회를 통해 불교의 학제 간 연구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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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統攝)이란 용어는 지난 2005년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하버드대 석좌교수)의 저서 <컨실리언스(consilience)>을 최재천 교수(이화여대)가 ‘통섭’으로 번역하며 우리사회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은 단어다. ‘큰 줄기’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는 뜻의 ‘섭(攝)’이 만나 이뤄진 이 단어를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이라고 풀이한다.
지난해 이화여대는 ‘통섭원’이란 연구소를, 서울대는 ‘범학문통합연구소’를 각각 개원하는 등 최근 학계에서는 통섭을 학제 간 연구, 학문간 연구, 지식의 통합 등 다양한 뜻으로 활용하고 있다. 학자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다산 정약용 등을 대표적인 ‘통섭형 학자’로 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