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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그 분이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도리’였다. 신라의 의상도 말했다. “연기라는 한 마디 말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거대한 은하계거나 혹은 미세한 먼지일지라도. 이를 화엄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한다. 우주는 서로 의존하고 있는 총체적 세계, 거대한 그물처럼 얽혀서 서로 영향을 준다. 샹들리에 구슬들이 서로 비추듯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무수히 분리된 개체로 구성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조화를 이루는, 그러기에 나눌 수 없는 전체로 역동적인 관계의 거물이다. 그래서 의상은 “전체라는 하나 속에 일체의 다양한 것들이 있고, 많은 개별 중에 전체라는 하나가 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의 극히 작은 먼지 속에 거대한 시방세계 우주가 포함되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했다. 이상에 의하면, 전체와 부분은 즉(卽)과 중(中)의 관계로 설명된다.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그리고 전체 중에 하나가 있다.
물리학자 프리조프 카프라는 전체와 부분에 대해서 설명한다. “모든 개체는 통합된 시스템이라는 뜻에서는 전체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 복잡성이 더 높은 수준의 전체에 대해서는 부분이 된다. 사실, 절대적 의미에서는 부분과 전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전체이면서 부분인 아(兒)조직체를 ‘홀론(holon)’이라고 부른다.”
‘하나’라는 우리말은 마치 ‘홀론’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전체의 의미로 쓰일 경우도 있고, 부분의 의미로 쓰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있다[一中一切]’고 할 때의 하나는 전체를 의미하지만, ‘백 명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경우의 하나는 부분을 의미하듯이. 전체와 그것을 이룩하는 부분은 다 같이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물질세계 전체를 상호 연결된 관계의 역동적 거물로 보는 현대 물리학의 이론은 불교의 연기론과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 학계에 대두한 ‘통섭(統攝)’이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인 양 화두가 되고 있다. 조금은 낯설기도 한 통섭이라는 이 단어는 영어 ‘consilience’의 번역어다. 최재천 교수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1929~)의 저서
세계를 개별적인 부분들로 분리해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현대 서구문명의 기저(基底)를 이루어 왔던 점을 감안할 때, ‘지식의 대통합’을 선창(先唱)하고 있는 그의 노력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근대화 이후 서양의 학문 방법에 크게 영향 받고 있는 우리의 학계 또한 세분화됨으로써 전체를 아우르는 큰 안목을 잃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로 모두를 꿰는 범학문적 접근을 할 때가 되었다고 외치는 최 교수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가끔 자기 영역의 목소리만 전체에 보태는 다학문적(多學文的)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학제적 연구의 벽을 넘어 ‘모든 학문을 꿸 수 있는 이론의 실’이 있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윌슨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세상에는 다수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 하나의 기본 진리만이 존재하는가?” 최 교수 또한 “통섭의 노력은 모든 것을 꿰뚫는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이라고 한다. 이들의 표현에는 희미하지만 어떤 ‘유일한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혹은 그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은 필자의 오독 탓일까?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곧 ‘비일비이(非一非異)’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문은 많고, 그 문으로 향한 길도 많다. 그래서 원효(617~686)는 <기신론소>에서 “법문(法門)은 한량없어서 오직 한 길만이 아니다. 이 때문에 곳을 따라 시설해서 모두 도리가 있다”고 했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원효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능히 모든 방면이 다 합당하고, 다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방면이 한 맛으로 통한다(由非一故 能當諸門 非異故 由諸門一味)”고 했던 것이다. 다양성의 인정,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기본 입장인 동시에 원효 화쟁논리의 한 전제이기도 하다. 통섭의 전도사격인 최 교수에 의하면, 화엄사상에 대한 원효의 해설에 통섭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필자는 아직 원효의 저서에서 통섭이란 단어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최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통섭이 원효의 사상과 통하는 바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원효는 통합과 더불어 전개를 동시에 강조했다. 그의 화쟁 방법에는 전개와 통합이 자유로워, 총체적으로 말하거나 개별적으로 논하는 방법을 자유롭게 구사하곤 했다. 원효가 즐겨했던 통합과 전개의 방법에 주목하여, “원효의 진리 탐구 방법은 개합(開合)의 논리로서 철두철미 일관되어 있다”고 지적한 이도 있다. 이 때문에 ‘통섭은 분석과 종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는 최 교수의 설명은 원효의 개합논리와 매우 닮아 있다.
원효는 어떤 경우에도 ‘산을 보지 못한 채 골짜기에서 헤매거나 나무를 버리고 숲 속으로 달려가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종요(宗要)를 “통합해서 논하면 일관(一觀)이요, 열어서 말한다면 열개의 문이다(合論一觀 開說十門)”라고 했다. 숲을 보는 통합적인 안목도 필요하고 나무를 보는 분석적인 논의 또한 중요한 것임을 원효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통합이나 전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웠다.
그는 말했다. “전개한다고 번거로워지는 것도 아니요, 합친다고 좁아지는 것도 아니다.(開而不繁 合而不狹) 또한 전개한다고 하나를 더 보태는 것도 아니고, 합친다고 해서 열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開不增一 合不減十) 이것이 통합과 전개의 묘술(妙術)이다.”
각각의 홀론은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 통합하려는 경향과 개성을 유지하려는 자기 주장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점에 주목했던 카프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개체의 가치를 유지해야 하며, 동시에 더 큰 시스템 속으로 그 자신을 조화 있게 통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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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경계를 엄격하게 지킬 필요야 없겠지만, 여전히 전공은 필요한 것이고,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안목은 가져야 하겠지만, 정밀한 분석적 사고 또한 필요한 것이다. 지식의 통합이나 학문의 울타리를 허무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들 일상적인 사고나 삶의 현장에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용어는 없을까?
문(門)에는 개폐(開閉)와 출입(出入)의 의미가 있다는 원효의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을 여닫으며 자유롭게 드나들듯 학문도 지식도, 일상의 상식도 막히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