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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도심 속에서 포교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면, 문득 스스로 부처님의 말씀을 올곧이 실행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교리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티베트 불교 중 동티베트 지역의 사찰을 찾아 떠났다.
우리는 일단 청두(城都)로 날아간 후, 기차로 란조우(蘭州)에 도착해서 샤허(夏河), 랑무스(朗木寺), 써다(色達)를 중심으로 순례를 하면서 청두로 내려오는 일정을 짰다. 3월 23일 청두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상 최고(最高) 최대의 오명불학원
써다는 해발 3900미터의 고산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로 지도상으로 봐도 써다에서 길이 끊기고 마는 오지 중의 오지다. 이러한 오지에 많은 닉마파 스님들이 모여서 수행을 한다고 한다. 닉마파는 티베트 불교 4대 종파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종파로서 파드마삼바바가 티베트에 불교를 정착시키면서 생긴 종파인데, 티베트 불교 종파 중 가장 밀교적인 성격을 보존해왔다고 한다. 이곳이 우리가 순례할 첫 번째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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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다에 가기 위해서는 마얼캉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더 올라가야 한다. 버스가 중간에 휴식겸 식사를 위해 한번 정차를 하여 간단한 식사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장족 두 명이 오체투지를 하며 삼보일배를 하며 오는 것이 보인다. 중간에 그들이 휴식하는 동안에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니 써다에 갔다가 다시 한 달에 걸쳐 70km거리를 오는 중이란다. 이곳에서 30km 떨어진 곳에 그들의 집이 있는데, 출발할 때부터 오체투지를 해왔다 하니, 장장 170km를 오체투지로 3보1배를 해온 것이다! 실로 이들의 불심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와 같다 할 수 있으니 새삼 존경심이 우러나옴을 억제할 수 가 없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여 두어 시간을 지나서 드디어 써다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발을 내딛는 순간 숨이 벅차오른다. 빠르게 움직이려 하여도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이 움직임이 더디다.
연룡사에서 만날 조선족 스님은 몽골에서 교사활동을 하다 티베트 불교에 감화되어 1998년 57세의 나이에 뒤늦게 출가한 분으로 법명도 ‘추양줘마’로 티베트 식으로 지은 분이다. 빵차(우리나라의 다마스와 비슷한 차량)를 타고 또 다시 산으로 굽이굽이 오르는데, 이 길은 포장이 되어있지 않아 내내 덜컹덜컹 몸이 위로 솟구치고 난리다. 이쯤 되고 나니 서서히 고산증세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 호흡은 물론이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하늘밑 산꼭대기에 위치한 연룡사에 도달해 차에서 내리니 일행인 오중철씨는 두통에 몸살기운으로 몸져눕고 말았다.
2평 남짓한 추양줘마 스님의 토굴에는 자그마한 부엌과 파드마삼바바(연화생보살-연꽃위에서 태어난 자)을 중심으로 자그마하게 차린 불전이 전부이며 침대도 바로 불전 앞에 좁은 공간에 놓여 있었다. 닉마파 스님들은 이렇게 자그마한 토굴에서 개별적으로 수행과 생활을 하는데, 수행은 경전 암송과 명상을 통해서 하고 정기적으로 큰스님에게 점검을 받는다 한다. 닉마파 스님들은 주불로 파드마삼바바를 모시는데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경 아직 티베트지역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 전에 인도 쪽에서 건너와 불교를 정착시킨 분으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이때 들어온 불교의 성격은 탄트라적 요가, 명상, 수행법을 강조했고, 현재 닉마파 스님들은 그때의 수행방식을 가장 잘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곳에선 특이하게도 연룡사 주지스님이 출가 후에 결혼을 했는데, 이는 깨달은 자들 사이의 결속이라 하여 내외 스님이 함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닉마파의 탄트라적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닉마파 스님이라고 해서 모든 이들이 다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탄트라 수행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스님 중에 계시를 받아 불법의 결혼을 한다. 이는 수행을 더 높은 과정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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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찾아오자 추위가 시작됐다. 추양줘마 스님은 염불 삼매경에 빠져 추위를 잊고 염불에 여념이 없다. 문득 나의 수행이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바쁜 포교활동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핑계로 정작 끊임없이 정진해야할 부처님의 길을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낮에는 푸른 하늘과 아직 새 풀이 돋지 않은 척박한 땅으로 둘러 싸였던 주위를 이젠 어두운 밤하늘을 땅에 쌓인 새하얀 눈이 비추고 있다. 그날 밤은 추위와 번민에 쌓여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침이 되어 예불에 동참하기 위해 밖을 나와 보니 온통 새하얗게 눈이 쌓였다. 일행인 오 선생은 간밤에 추위에 시달려 몸이 회복이 안 되었지만 몸을 추슬러 예불을 보고 다시 써다에 있는 오명(五明)불학원을 방문할 차비를 하였다.
오명불학원 입구에서도 신분증 검문을 하고 있었다. 써다로 오는 길엔 유독 검문소가 많아 검문소마다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차량을 확인한 후에 통과를 시켰다. 중국 전역에 수도 없이 많은 사찰이 있건만 왜 유독 이곳만 그리 까다로운가 하는 의문이 생겨 물어보니, 이쪽을 비롯한 동티베트 지역은 아직도 티베트 독립의 열망이 강한 곳이라는 것이다. 스님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뿐만 아니라 여행객들의 입소문으로 외국인들의 출입이 점차 빈번해지고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99년경부터 중국정부가 출입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2003년도에는 탱크를 몰고 2000~3000여 개의 토굴을 밀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샤허에서 만난 한 핀란드인도 2년 전에 이곳을 방문하려 하였으나 출입을 막아 결국 발길을 되돌리고 말았다 한다. 중국정부가 불교와 티베트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엄격하게 통제를 해왔는지 가늠할 만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산자락을 등에 지고 서 있는 커다란 일주문 만 보이니 불학원이나 사찰이 어디 있기는 한 것인가 의아심이 든다. 입구를 지나 황량한 민둥산을 타고 돌아서 앞을 보니 갑자기 입이 벌어지는 광경이 펼쳐진다.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산등성이 마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이 마치 예전 서울의 달동네를 보는 것만 같다. 이것들이 모두 스님들이 수행하는 토굴이라는데 그 규모가 1만 여 채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장 큰 불학원인 오명불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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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에서는 부처님 모시는 사찰을 가장 높은 곳에 짓는다 하여 보통 산정상이나 산자락에 사찰이 자리 잡는데, 아무튼 나무하나 제대로 구경하기 힘든 이 척박한 고지에 어떻게 이런 대규모의 불학원이 건설되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일부러 찾아와 오직 수행정진에 여념이 없는 이 많은 스님들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대법당에 이르니 입구에 설치된 신발장엔 신발들이 넘쳐나는데 신발수를 헤아려 보아도 1천명은 족히 넘게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안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 많은 스님들은 학원내의 스님들 중 일부일 뿐이고 대부분의 스님들은 토굴에서 개별적으로 수행 중이라 한다. 특히 명상수행 할 때에는 외부 인사를 전혀 만나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머리도 중간에 깎지 않고 출입을 금하며 식사공양 외에는 오직 각자의 밀교수행에 전념한다 한다. 이곳에서 한 스님의 토굴을 방문하였는데, 워낙 토굴이 빼곡히 들어찬지라 겨우 한사람이 지날만한 골목을 통해 역시 2평 내외의 최소한의 공간만을 확보한 채 스님들은 구도의 길을 가고 있다.
넓디넓은 불학원 내에는 상점, 서점 등 수행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다 구비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물건을 사는 것이 더욱 저렴하고 질도 좋아 연룡사 스님들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2시간 걸려 이곳에 와서 사간다고 한다. 닉마파 상점들을 지도부가 지원을 해주기에 가능한 일이란다.
산 정상에는 ‘탄천’이라 하는 거대한 탑이 있는데 스님들과 불자들이 탑을 돌며 기원과 기도를 드린다. 이 탑 정상에는 탄트라상, 즉 남녀합일상이 모셔져 있는데 신심이 없는 이에게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 한다. 밀교적 성격이 강한 불교종파 중에는 남녀합일을 중요시 하는 곳이 있는데, 이를 오해하고 외설적이거나 사이비적으로 보기 쉽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남녀합일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차원인 것이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쾌락적 차원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을 부정하거나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랑무스에서 만난 스님은 종파 간에 갈등이 없는 지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한다.
“우리는 서로 간에 전혀 갈등이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한 곳을 향해 정진하고 있으니까요. 길이 다르다 해서 목적지가 틀린 것은 아니잖습니까. 문제는 지금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한다는 것이겠죠.”
그렇다. 종파가 틀리고 양식이 틀리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자비 넘치는 사회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던가.
저 너머 산 정상에 가득 뒤덮인 타르초(부처님말씀을 새긴 오색천)들이 바람이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린 하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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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엔(紅原)에서 싹트는 작은 희망
써다에서 마얼캉으로 돌아와 1박을 한 후 홍위엔을 향해 출발했다. 청두에서 마얼캉으로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만난 게빠는 탕카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이다. 동시에 그는 작은 미술학원을 운영한다는데 우리에게 복사지에 인쇄한 팸플릿을 건네주는데 거기엔 사비로 운영하는 무료학원이 자금난으로 지원을 바란다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헤어지면서 꼭 한번 홍위엔에 들르라는 말에 어차피 랑무스로 가는 길에 위치한 곳이라 겸사겸사 들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아래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이 초원은 루얼가이를 지나 랑무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수많은 야크와 양 때들이 풀을 뜯기에 여념이 없다. 아직 봄기운이 무르익지 않아 온통 누런 빛깔을 띠지만 여름이 되면 푸름으로 가득 차 하늘과 어우러진 모습이 또한 장관이라 한다.
마얼캉만 해도 고산증세가 좀 가시던 것이 홍원에 이르니 작열하는 태양에 몸이 더워지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장족들은 하나 같이 이목구비가 매우 시원시원하고 피부는 햇빛에 그을려 거무스름하고 눈매는 번뜩인다. 때문에 아무런 말없이 시꺼먼 얼굴에 번뜩이는 눈매로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금방이라도 위해할 것 같이 무서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 간단히 인사라도 하고 눈웃음이라도 지어 보이면 그들은 금새 환히 웃으며 순박함을 보인다. 장족들은 외부인일지라도 서로 마음을 트고 만나면 이내 집으로 초대를 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준다. 마치 오래전 우리네 고향의 인심을 만나듯 이런 그네들의 모습이 너무도 좋았다. 점점 현대 문명에 젖어들수록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정겹다.
게빠가 사는 곳은 홍원에서 차로 30분정도 떨어진 와치샹이란 곳이다. 4살, 5살의 어린 아이부터 성년이 다된 청년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반을 나눠 30여 명이 공부하고 있었고 100명으로 늘리는 것이 목표라 한다. 이곳에 교장은 빅마스촨이란 젊은 스님인데, 역시 써다에서 수행한 후 이곳에서 게빠와 함께 티베트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한다. 이곳은 중국어, 티베트어, 그리고 탕카를 가르친다 한다. 학교 재정은 스님과 게빠가 직접 돈을 벌거나 후원을 받아서 충당한다. 게빠는 이번에 청두에서 한 달여간 탕카 작업을 한 후 돌아온 것인데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바로 학교 운영에 사용된다. 게빠가 돌아온 후 이번엔 빅마스촨 스님이 후원을 받으러 북경에 갈 예정이라 한다. 와치샹 중심부에는 분명 제법 큼직한 학교가 있는 것을 목격한 나로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헌신적으로 이 학교를 운영하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곳은 중국정부에서 운영하는 학교인데 공식적으로 티베트어나 티베트문화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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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리면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에 사비를 털어서 헌신적으로 이 학교 운영에 힘쓰는 것이다. 마을에도 그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 모두가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알고 지켜나가 언젠가는 독립의 날이 오기를 염원하기에 이렇게 작은 씨앗이나마 뿌려두는 것이리라. 그들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열정에 경의를 표하면서 미약한 도움을 약속하였다. 개인적으로 이들이 어서 빨리 자신들의 권익을 되찾고 최소한 완전한 자치권이라도 되찾아 진정한 자유 속에서 불국토를 이루기를 바랄 뿐이다.
루얼가이-절을 찾은 당원들
랑무스를 가기 위해선 루얼가이를 경유해야 한다. 청두를 출발해서 지나온 도시가 모두 그렇듯이 루얼가이 역시 도로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작은 도시이다. 그 끝자락에 달라사란 절이 있다. 이곳에 새로이 지어진 박물관이 있는데 1층엔 경전을 비롯한 각종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고, 2층에는 티베트인들의 문화유산이, 3층에는 티베트불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에 이곳을 들어가려 하니 문이 잠겨 있고 한 스님이 30분 정도 지나서 다시 오라한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왜 문이 잠겨 있는가 싶고 나중에 다시 오라는 건 또 뭔가 싶어서 절을 둘러보고는 다시 가 보니, 아까 그 스님이 이젠 들어와도 된다고 한다. 박물관을 관리하는 스님인 듯한데, 장소를 친절히 가르쳐 주고, 중요한 서적도 짚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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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공산당 간부들이 단체로 견학을 왔다. 당의 지원을 받아서 박물관을 지은 것인지, 아니면 새로 지어진 박물관을 말 그대로 견학을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간부들이 티베트 사찰에 견학을 온다는 것 자체가 이색적이다. 중국이 종교적, 문화적 유산을 관광사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려 드는 경향이 많지만, 현재 실질적으로 중국 내에서도 그동안 감추어졌던 불교를 비롯한 종교적 열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란조우의 오천사는 사찰 내에 놀이 기구도 있고, 성도의 소각사의 경우 출구를 통과하면 바로 동물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문수원 같은 경우는 경내에 식당과 정원이 꾸며져 있고 주변 거리에는 관광상품점, 식당, 경극극장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런 면모가 다소 불경스러운 면도 있고, 소란한 점도 있지만 중국과 같이 오랜 기간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종교를 배척한 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런 면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불교와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중국이 그 오랜 역사에 걸쳐 쌓아온 풍성한 불교적 뿌리와 자산을 생각해 본다면 중국 내에서의 불교의 부흥의 순간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