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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미나에서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이 ''한국 선불교의 대중화''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다음은 전문.
한국 선불교의 대중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서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계시는 많은 수행자들과 불교 학자들의 노고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있어왔던 불교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미래의 인류에게 커다란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동아시아 불교학회 여러분께서 크게 노력하고 계시는 일에 대하여 앞으로도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겠으며, 이 큰 뜻에 동참하게 해 준 인연에도 거듭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우리 불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불교의 교리적 이해와 신행생활과 더불어 수행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바세계의 인연 있는 중생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 속에서 증명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불교를 믿는 신자조차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우려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이 불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동안 어떻게 해야 바르게 알고 행할 수 있게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 즉 그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을 의지하면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한편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불교인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발전된 불교의 모습을 행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는지는 몰라도 불교를 아끼는 수많은 이들이 오늘날 불교를 믿고 있는 형태에 대하여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점도 잘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수행자로서 공부를 잘하고 계시는 분들도 적지 않게 자리하고 계시지만 현실적으로 수행을 통해서 향상일로를 걷게 하기 위한 믿음을 내게 하는데 있어서 그 한계가 엿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 주위를 뒤돌아보았을 때, 불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큰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른 눈을 뜨고 정진하지 않고 있으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드러내어,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 된다고 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의해 결코 무너지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불교를 믿으면서 불교를 무너트리고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이렇듯 불교는 다른 종교에 의해 허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본연의 큰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불교인들이 정신적 성장을 꾀할 수 있는 진정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수많은 신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어리석은 중생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근기에 맞춰 설하신 인천교적인 가치를 끝없이 추구하고 있으면서 이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인양 착각하고 있으며, 이 일을 잘 알고 있는 종교지도자나 선각자들이 안목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유도 내지 교육시키지 못하는 데서, 마치 물이 고이면 썩고 냄새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모두 거듭날 수 있도록 채찍질하여 눈 밝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청해 스스로를 발전시키거나 안목을 바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소화하고 실천해서 원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이야말로 어디에도 머물거나 물들지 않고 향상일로를 걷게 해서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힘을 작용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불교가 나아갈 바는 정체성을 잘 알고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출가자는 예외로 하고 재가불자들에게는 삼보를 공경하고, 오계를 받아 지녀 악(惡)을 그치고 항상 선(善)을 행하게 하며, 더 나아가 보살계를 받을 수 있게 해야 되겠습니다. 처음 불교를 믿을 때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배우며 신심을 일으키고, 나아가 소의경전인 금강경과 육조단경을 통해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수행법 가운데 왜 간화선 수행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수행법인지에 대해 이치라도 잘 알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이며, 간화선 수행을 통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 온몸으로 수행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간화선 수행을 바르게 체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향기는 이와 같은 공부를 한 사람만이 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을 뜬 수행자들이 지혜를 눈뜰 수 있는 수행방법을 제시해서 길을 잃고 헤매는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바른길을 열어서 눈을 뜨고 걸어갈 수 있도록 인연을 성숙시켜 줘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교리적 차원에서도 인천교나 소승교가 부처님 가르침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더 이상 구태의연하게 인천교나 소승교의 복만 짓고 공덕은 쌓을 수 없는 유상(有相)의 인연에 머물지 말고 공덕(功德)으로 거듭날 수 있는 대승교(大乘敎)의 상(相)을 여읜 무상(無相)을 눈떠 원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수행을 할 때, 큰 공덕을 쌓게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으로 선(禪)과 교(敎)를 혼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깨닫지 못해 무지(無知)하다는 점이며, 자기가 믿고 있는 가치관이 옳다고 고집하고 주장하다 보니 부처님이나 조사님들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사회윤리개념과 종교윤리개념의 혼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눈이 아닌 전체를 편견 없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뒷사람들에게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인연을 열어 줄 수 있어야만 양쪽이 화합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정신적 우상과 물질적 우상을 타파하고 우상 아닌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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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지혜를 눈뜨게 해 줄 수 있는 참된 수행방법은 무엇이며, 과연 그런 수행방법을 현실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식이나 지식이 아닌, 밝고 어둠에 관계하지 않지만 밝고 어둠을 동시에 비춰 볼 수 있는 밝음, 즉 지혜라고 이름하여 불리고 있는 실상(實相)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 이론적 근거만 가지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찾아 지혜를 밝혀서 근본 무명(無明)을 깨트릴 수 있는 공부를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도록 장치되어진 속에 들어가 원력을 세워 수승한 안목을 열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흔들림 없이 생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충만한 행복을 인연 있는 이들에게 꼭 맛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가 착각하고 있는 모습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상식적으로 눈앞에 있는 물건을 볼 때 우리는 눈이 본다거나 내가 본다 또는 마음이 본다고 말을 합니다만, 사실은 눈이 보는 것도 내가 보는 것도 마음이 보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눈이 본다고 하면 눈 뜨고 죽은 송장의 눈으로도 볼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눈을 떴어도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눈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보게 된 것이지요.
무엇이 있어 눈으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일까요?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보는 것도 아니며, 마음이 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일단의 일을 깨달은 이가 이 일을 알게 하기 위하여 짐짓 마음이라는 명사를 붙인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쉬운 일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이 일단의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의심하게 했고 의심 끝에 깨달음에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의심하고 의심해서 더 의심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가 눈앞에 가로놓인 정신적인 장벽을 무너트리게 되면 본연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수행법을 통해 거듭난 눈 밝은 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할 때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드러날 수 있도록 베풀어줘야 합니다. 인연 있는 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바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 보다 쉽게 향상일로를 걷게 하고 시절인연 따라 공부를 지어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불사(佛事)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누구나 불교를 바르게 믿고 수행을 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천교적인 신행을 중심으로 염불, 명상, 간경, 기도, 다라니 등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데 대해 문제점을 바르게 지적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연을 눈뜨게 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소승교에서 말하는 수행인 관법, 즉 자비관, 부정관, 백골관, 수식관 등을 행하는 수행은 상(相)을 여의지 못하고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머물게 된다고 부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한 대승교에서 행하는 수행인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나 마하지관법(摩訶止觀法) 등으로 상을 여의고 공부할 수 있는 인연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알아야 되겠고, 더 나아가 격을 뛰어넘은 것 같은 돈교적(頓敎的) 가르침인 최상승 돈오(最上乘 頓悟)를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수행의 인연을 눈 열게 해줘야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증(修證), 즉 수행이나 증득함을 빌리지 않더라도 완성된 부처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고 드러낸 최고의 가치를 눈 열고 소화할 수 있어야 될 것이며, 나아가 이 모든 격의(格義) 불교를 뛰어넘어 파격(破格)을 범한 것 같은, 불조(佛祖)를 욕하고 가르침을 내동댕이치고 바로 깨달음을 드러내는 선종(禪宗)의 조사선(祖師禪)이나 간화선(看話禪), 묵조선(黙照禪) 등의 수행까지 망라할 수 있는 이치를 밝혀, 이 모든 것을 직접 체득하여 확인하고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을 승속 남녀노소 누구에게라도 아낌없이 열어 보여줘야 될 것입니다.
선불교의 대중화란 안목을 바르게 열지 않고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시중(市中)에 나와서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직접 대중 속에서도 시도해 보지도 않고 선불교의 대중화가 어렵다고 해서 어찌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선불교의 대중화란 말은 있었지만 그 실체를 맛본 적이 없어서 조금 어색한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른 눈을 뜬 수행자라면 시절 인연 따라 사부대중이 함께 도심 속에서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선수행(禪修行) 방법인 것입니다. 선수행을 바라던 이 시대의 많은 재가불자들에게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 같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선불교는 종교를 위한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를 수단으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관심이 있고 인연이 있는 불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겠지만 불자가 아니더라도 바른 가르침을 만나면 쉽게 공부의 힘을 얻고 바른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선불교의 특징입니다.
가르침에도 의지해야 되겠지만 어느 순간 가르침까지도 모두 버리고 직접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인연에 나아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할 때 선불교의 대중화도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 속에서 많은 이들이 직접 맛보고 수행하며 원력으로 거듭나 복도 짓지만, 공덕을 쌓아 모습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정진할 수 있는 공부인연을 짓도록 할 때, 세계인의 지성이 거듭거듭 깨어나게 될 것이며, 선불교의 수행을 통한 정신세계의 안정적 지속력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을 가져다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일은 선지식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 체험해 보지 않고서, 어떻게 스스로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요?
이 일단의 일은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눈 밝은 스승을 찾아서 공부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안목(眼目)을 열기가 쉽지 않겠지만 눈 밝은 선지식을 의지하고 공부해서 원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수행인 간화선(看話禪)이야말로 지금의 현실에 알맞은 선불교를 대중화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가르침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들이 행하는 가운데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바르게 살펴 쓰지 못하고 두서없이 지내왔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며, 구태의연한 것인 줄조차 모르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불조(佛祖)께서 말씀하신 대의명분을 바로 살피고 세워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 지구촌 인류에게 더 큰 희망과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인 선불교를 더욱 널리 펴고 가르쳐서 지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하자는 말로 인사를 갈음하면서, 동아시아 불교학회의 무궁한 발전과 여러분의 큰 힘이 많은 분야에 널리 퍼져서 한국선불교가 더욱 큰 발전을 거듭할 수 있고 나아가 세계 정신사적 입장에서도 큰 기여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불기2551년 4월 28일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