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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해탈, 궁극적 지향점 같다”
교불련-기독자교수협 2회 공동학술세미나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회장 이종오)와 공동학술회의를 개최한 한국교수불자연합회 김용표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해탈과 구원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와 기독교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는 ‘해탈’과 ‘구원’의 참뜻과 우리네 삶 속에서 이 지향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모색해 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교수불자연합회(회장 김용표)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회장 이종오)는 4월 2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실에서 ‘구원과 해탈’을 주제로 제2회 ‘기독교-불교 교수 공동학술회의’를 열었다.

주제발표는 ‘구원’과 ‘해탈’의 정의를 내려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은 ‘구원, 오늘 우리의’라는 발표에서 “구원은 나라는 존재가 이미 ‘너’와의 관계성 속에 있음을 통찰하는데서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하느님에 의해 이끌어진다’는 점에서 구원은 자력적이라기 보다 근원적으로 타력적이지만, 자력이라는 것 역시 ‘타(他)’라고 하는 관계성 안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원장은 “구원이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근거로 살아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근원적 관계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4월 2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기독교-불교 교수 공동학술회의>. 사진=박재완 기자

‘열반’의 의미는 이민용 참여불교연대 공동대표가 짚어봤다. 이 대표는 “열반이 종교적 오메가로 부각된 것은 서구 기독교적 발상”이라며 “열반은 현실의 고통, 인간적 한계 상황을 벗어나는 일이라는 이원록적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열반의 한계가 윤회이고 윤회의 한계가 열반이며 이 두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 용수의 이론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구원과 해탈의 사회적 의의는 무엇일까?
이명권 코리아아쉬람 대표는 “구원의 결과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며, 해탈의 결과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길, 곧 보시(布施)의 실천”이라고 말했다. 최종석 교수는 “구원과 해탈은 곧 의인(義人)과 보살의 삶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곧 생태적 삶을 실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교수불자연합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한 공동학술회의에는 100여 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참석했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7-04-27 오후 5:19:00
 
한마디
구원과 해탈은 다르다. 언어상으로도 다르고 의미상으로도 다르다. 말과 같이 구원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절대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다. 해탈이란 벗어나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어둠을 벗어 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자력과 타력으로 염불과 참선을 이야기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과는 차별되 그 벽이 있다. 함께봐서는 안된다. 단 궁극의 안락즉 편안함을 이야기하는 것에서는 이햐가 된다.
(2007-04-30 오전 9:59:46)
154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염불이 타력 신앙이지요.기독교의 주여하며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그러나 타력도 자기에게 있는 불성을 찾기 위함이지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라고 봅니다.설사 같더라도 믿으면 구원받고 안믿으면 지옥간다는 종교하고는 화합도 공존도 안될 것입니다.기독교 지도자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한..
(2007-04-28 오전 10:12:15)
150
모든 종교가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히들 ‘종교는 다 똑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전 인류를 구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 또한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할 수 있고, 그 가르침 속에서 향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행복해지고,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참되게 살아도 구제 될 수 없다”는 식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유일. 절대권한의 신 앞에서 언제나 수용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2007-04-28 오전 1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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