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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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은 곳 그러나 최고 명당에 묻힌 태조
1대 태조 건원릉(1)

태조 이성계 <1335~1408년, 74세. 재위기간 6년 2개월, 1392년 7월(58세)~1398년 9월(64세)>

태조는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늦은 나이에 즉위했다. 물려받은 왕위가 아니라 쟁취한 자리다. 역성혁명을 일으켜 58세에 왕이 됐다.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보면 뒷방 늙은이가 되기에도 늦다. 요즘 세상에도 정년퇴직감 아닌가. 태조 이후에는 10대 청소년기에 즉위한 왕이 13명이나 된다.

이성계는 용맹과 추진력으로 뭉쳐진 인물이다. 지혜와 자비, 반성과 성찰이 보충되지 않았다면 실패한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을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일개 장수에서 군왕으로 이끈 선지식이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은 고려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성계를 만난 후 그의 삶이 달라진다. 그 역시 고려 왕조의 무능과 부패에 절망하고 있었다. 새 왕국 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임과 동시에 이성계의 충실한 인도자, 스승이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음양도참설에 밝았고 꿈 해몽에 능했다.

태조 즉위 이전에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즉위를 예언했다. 무학이 설봉산 아래 토굴에 기거하고 있을 때 이성계가 찾아와 물었다.
“꿈에 집을 부수고 들어와 서까래 셋을 지고 나갔는데 이게 무슨 징조입니까?”
“허허, 경축할 일이요. 서까래 셋을 진 사람은 왕(王)을 가리킵니다.”
“꽃이 거울에 떨어지니 이 꿈은 또 무엇입니까?”
“꽃이 떨어지면 마침내 열매가 열 것이요, 거울에 떨어지니 어찌 소리가 없으리오.”


이성계가 즉위 후 송도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궁궐터를 잡기 위해 무학 대사를 대동하고 여러 차례 한양을 답사했다. 대사는 지금의 왕십리를 궁궐터로 잡으려 했다. 그때 검은 소를 타고 가던 노인이 소를 툭툭 치면서
“이놈아, 이 무학만치나 미련한 소야!”
대사는 그 소리를 듣고 노인에게 다가가 절을 하고
“어르신, 제발 가르쳐주십시오.”
노인은 껄껄 웃으며
“여기서 십 리를 더 들어가시오.”

이렇게 해서 십 리 더 들어간 곳이 지금의 경복궁이다. 십 리를 더 가라고 하여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런데 경복궁을 짓는 중에 대들보가 자꾸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대사가 고민을 하는데 하루는 밭을 갈던 노인이 “그 터는 학의 형상이니 날개부터 눌러야 하오”라고 충고했다. 대사는 날개 부분에 4대문을 먼저 지었다. 그러자 궁이 무너지지 않아 무사히 완공했다. 대사는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노년의 전부를 쏟았다. 하지만 조정의 중심 세력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성리학자들이었다. 대사는 이런 현실을 탓하지 않았다. 혁명에 대한 염원은 부패가 극에 달한 고려 말 불교계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태조에게 설하기를, ‘유교는 인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목적은 같은 것입니다.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가 굳건해집니다. 더불어 순간적인 잘못으로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사람들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 주십시오.’

대사는 자신의 소임이 끝났음을 알고 조용히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405년 79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조선 개국의 핵심 주체, 이성계의 스승이면서 일체의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 무학 대사다. 역할에 대한 지분확대를 주장한 정도전, 이방원 등이 피투성이 싸움을 한 것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성계의 입가에 넉넉한 웃음이 넘쳤다. 도읍지가 완성된 축하 잔치에서 있었던 일이다. 태조가 호방하게 웃으며,
“오늘은 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터봅시다. 무학 대사를 보니, 꼭 돼지 같소이다. 허허허!”
대신들도 따라 껄껄 웃었다. 대사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전하께선 부처님처럼 보이십니다.”
태조가 오히려 당황했다.
“과인은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어찌 과인을 부처라고 하는 것이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입니다.”
태조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잠시 후 껄껄 웃으며,
“과인이 졌소이다. 그 말씀 깊이 새기리다.”
아직, 자식들끼리 살육전을 예감하지 못한 좋은 시절이었다.


건원릉, 혁명가 이성계가 누워있는 곳이다. 능호가 유일하게 세 글자다. 스스로 눕고 싶었던 자리가 아니다. 봉분 위엔 잔디가 아닌 함흥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경기도 구리시 검암산 아래 자리 잡은 동구릉은 천하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지세를 보고는 ‘어찌 이와 같은 하늘이 만든 땅이 있는가? 필시 인공으로 만든 산이로다’라고 할 정도다. 태조의 건원릉은 아홉 개 동구릉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태종 8년(1408), 태조가 74세로 승하했다. 태조의 수릉(살아서 미리 잡아 놓은 능, 민가의 가묘와 같은 것, 현재 영국 대사관 자리)은 강비가 묻힌 정릉이었다. 여기에 능을 쓰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3대 태종의 시대다. 부자간의 반목과 갈등이 극심했던 그들이 아닌가.

태조가 죽자마자 태종은 정릉을 현재 자리(성북구 정릉동)로 이장하고 봉분을 깎아버렸다. 강비의 능을 묘로 강등해서 강비를 후궁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정릉에 있던 병풍석의 석물의 일부는 다리(현 청계천 광통교)를 고치는데 사용하고 일부는 궁궐 뒤 빈터에 방치했다. 정릉이 다시 종묘에 왕비로 올라가기까지는 25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현종 10년(1669) 때다.

죽기 전 태조는 자신을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태종은 유언마저 무시했다. 아버지의 유언이지만 조선 개국의 시조를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을 수 없다는 이유다. 그 대신 함흥에서 갈대를 뽑아 와서 봉분에 덮었다. 권력의 삼엄함에 살이 떨린다.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급명을 내렸다. 풍수에 능한 조정대신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극복할 지상 최대의 국책사업을 벌여야겠다는 야심에 불탔다. 한양 80리 안에 최고의 명당을 찾아라. 총책임자는 왕의 풍수고문이자 영의정인 하륜이었다. 하륜은 국풍을 대동하고 왕릉 택지에 골몰했으나, 숭유배불왕조인지라 불교풍수 법맥, 법통이 단절되어 반풍수만 남아있었다.

정작 왕릉 터를 잡은 이는 조정대신 김인귀였다. 하륜은 뛰어난 궁중건축가였던 박자청(1357~1423)을 불러 왕릉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이 공사를 성공리에 마친 공로로 후에 공조판서(건교부장관)가 된다. 어명이 떨어지자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징발한 역군 6000명이 검암산으로 동원됐다. 왕릉 조성공사는 두 달 열흘 걸렸다. 왕릉 관리기구로 개경사라는 원찰을 지었다. 태조 왕릉에서 동남방 700미터 떨어진 곳에 짓고 스님 100명을 배속시켰다(기록만 전하고 지금은 흔적도 없다).

1408년 9월 9일, 태조는 이렇게 마련된 건원릉에 묻혔다. 조선 최초의 왕릉이자 동구릉이 조성되는 시작이다. 원치 않은 곳, 그러나 최고의 명당에 묻힌 태조 이성계, 전하 행복하시옵니까?
글=이우상(소설가)․ 사진=최진연(사진작가) | asdfsang@hanmail.net
2007-04-12 오후 2: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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