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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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 스님 행장 및 수행일화

법전 스님은 1925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했으며 속명은 김향봉金香奉이다. 1939년 영광 불갑사에서 설호 스님을 계사로 설제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고, 1944년 장성 백양사 강원 대교과정을 마쳤으며, 1948년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및 보살계를 수지했다.

1949년 24세때 성철 스님의 봉암사 결사에 참여해 타사시구자(拖死屍句子: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느냐) 화두로 정진을 하던 중 경계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는 등 공부의 힘을 얻었다.

1951년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 스님을 은법사로 도림이라는 법호를 받으면서 더욱 공부에 매진했으며, 그 뒤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 스님께 인가를 받았다.

1952년 이래 수십 년간 창원 성주사, 문경 갈평토굴, 태백산 도솔암, 문경 대승사 윤필암, 묘적암, 김용사 금선대, 범어사, 해인사 등 제방선원을 다니면서 참선수행 한 이래 50하안거를 성만했다.

1967년 해인총림 유나를 지냈고, 1969년 김천 수도암으로 옮겨서 선원을 복원해 많은 납자들을 15여 년간 제접했으며, 그리고 종단이 어려울 때인 1981년 종회의장 1982년 총무원장을 잠시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호계위원장, 본사주지 연합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85년부터 해인총림 수좌로 해인사 선원에서 납자들을 경책하면서 정진했으며, 이듬해인 1986년 해인사 주지로 취임해 8년 동안 가람의 당우들을 일신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틈틈히 선원에서 정진을 게을리 하시지 않았다.

1993년부터 3년간 해인총림 부방장을 지내던 중, 1996년 방장으로 추대돼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또한 성철스님 문도회 회주를 맡고 있다.

2000년 10월 원로회의 의장에 추대됐으며, 2002년 3월 대한불교조계종 제11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도림법전 스님 수행일화 모음

1.봉암사 결사 시절

산승이 24살 되던 해 가을이었습니다. 오십년도 더된 일입니다. 백양사에서 여름살림 해제를 하고 해인사로 가기 위하여 길을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해인사에 가려는 객스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스님께 해인사까지 좀 데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고 또한 백양사 근처 외에는 먼길을 다녀본적이 없어 해인사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행 중인 그 스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법주사 복천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문경 봉암사를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스님들의 사는 모습을 보니 너무 신심이 났습니다. 늘 장삼을 입고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바로 이 장삼입니다. 보조스님이 입었던 장삼이라고 하여 ‘보조장삼’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사도 화려한 비단가사 대신 괴색의 소박한 가사를 수하고 있었습니다. 바루도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목바루 대신에 와바루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생활하는 모습이 너무도 반듯해보여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습니다.

같이 갔던 그 스님에게 ‘여기서 함께 사는게 어떠냐’고 했더니 ‘규칙이 까다로와서 힘들겠다’라고 하고서는 떠나버렸습니다. 성수스님께서 지객소임을 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살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고 방부인사를 하려니 큰스님께서 부른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성철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는 일도 많고 규칙이 까다로울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항상 장삼을 입고 생활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이 하는대로 따라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여 방부를 허락받았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봉암사 결사''의 한구석을 산승이 차지하는 인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산승의 중노릇은 새로운 계기를 만났고 성철노사를 비롯하여 청담스님 향곡스님 자운스님 등 많은 선지식을 만나 바른 법에 눈뜨게 되었습니다.공부는 공부대로 그리고 일은 일대로 해야 하니 딴 생각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 여건이 화두 일념이 되지 않으면 도저히 배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밭매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탁발하고 그리고 공부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 때 산승의 화두는 ‘타사시구자拖死屍句子’ 즉“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느냐?”였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정진을 좀하고 시간이 지나야 화두가 들린다는데 나는 앉자마자 바로 화두가 들려 힘들이지 않고 정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7개월을 화두가 성성한 경지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다 가끔 소견난 소리를 한마디씩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아마 당시의 원주소임을 보던 응산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노장님께 ‘법전이가 아무래도 경계가 있는 것 같으니 한번 점검을 해보라’고 귀띰을 했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불려갔습니다.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는냐? 한마디 일러라.”
그러길래 오른쪽 주먹을 내보였습니다.
“다시 일러라”하길래 왼쪽주먹을 내보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식으로 말고 말로서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아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말고 다시 한번 일러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꽉 막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쏜살같이 문밖으로 밀어내더니 세숫대야의 물을 머리에다 퍽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더 큰일은 그 날 저녁 큰방에서 벌어졌습니다. 노장님이 냅다 큰방으로 와서 문을 확 열어재끼고 뚜벅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와서는 입승 스님에게 “밥값 내놓아라. 밥값내놓아라.”하면서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연이어 그 옆의 스님에게는 향로의 재를 둘러 씌웠고 또 다른 스님에게는 다기물을 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입니다. 너무 돌발적이라 대중들은 영문을 모르고 혼비백산하여 사이문으로 도망치다가 몇몇 스님은 허리나 다리를 다쳐 치료하느라 여럿날 고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노장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나” 하면서 전부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나만이 그이유를 알아 혼자서 빙그래 웃었습니다.

내가 몸이 시원잖아 쓸데없는 꿈이 많았었는데 그날 이후 잡된 꿈이 거의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낮에 열심히 정진한 날에는 꿈에도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법열(法悅)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철노사께서는 납자를 제접하는 방법이 유달랐습니다. 앉아서 졸거나 방일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고함을 지르거나 그렇치 않으면 몽둥이로 내리치시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끌어다가 봉암사 계곡으로 처박아버리곤 했습니다. 덩치큰 스님을 멱살잡이하여 끌고 갈 때 힘이 부치면 나보고 뒤에서 밀라는 것이였습니다. 노장님은 앞에서 잡고 나는 뒤에서 밀고 하여 여러스님을 물 속에 빠뜨렸습니다. 공부를 시키고자 하는 노장님의 경책은 이렇게 서슬이 시퍼랬습니다.



2. 통영 안정사 천제굴 시절

그러나 얼마 후 6.25로 인하여 대중들은 봉암사를 떠나게 되었고 산승은 노장님과 함께 고성 문수암, 월래 묘관음사를 거쳐 통영 안정사 천제굴로 갔습니다.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노장님을 모시고 정진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베껴와서는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첫구절이 “군불견(君不見)가?”였습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하는데 첫구절부터 영 그말이 와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배우겠다”고 했더니 힐끔 한번 쳐다보더니 그냥 방을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또 오셔서 증도가를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군불견君不見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길래 “나한테 그렇게 묻는다면 등가죽을 차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참을 빤히 쳐다보더니 “정신이 맑구면!” 하면서 방을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불러서 갔습니다. 종이에다가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써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정식으로 은법사(恩法師)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1951년의 일입니다. 봉암사의 인연이 평생 노장님을 모시고 살게 되는 인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당돌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가의 법맥이 어떤 것입니까?”
“법맥이 곧 인맥이니라.”
“스님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나의 은사는 동산(東山)스님이니라.”

그 때 도우 스님이랑 함께 시봉했는데 그 스님도 떠나버리고 나 혼자서 결국 모시게 되었습니다. 밥하고 국 끓이고 반찬만들고 상차려 드렸습니다. 솜씨가 괜찮았는지 “내가 어디가서 이렇게 맛있는 것 얻어 먹겠나”하면서 맛있게 드시곤 했습니다.

빨래하고 불 때고 청소하고 약달이고 하루종일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약은 달이다보니 바빠서 시간을 제대로 못맞추어 량이 들쭉날쭉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약단지를 공중에 매달고는 저울처럼 추를 달아서 약량이 일정해지면 수평으로 되도록 했습니다. 약이 달아서 일정하게 되면 수평을 이루므로 다른 일을 하면서도 약을 달일 수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늘상 같은 농도 같은 양으로 어른에게 드실 수 있도록 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였습니다. 세월이 수십년이 흘러도 다른 상좌들의 약시봉을 받을 때 마다 노장님은 “법전이 발꿈치만 따라가라”고 혼내는 걸 몇번이나 들었습니다.

또 무슨 신심인지 벽발산넘어 시장보려 지게지고 가면서 장삼을 입고 다녔습니다.

혼자서 다섯여섯사람 몫을 하면서도 저녁이면 공부해 보겠다고 용을 썼습니다. 요새 나도 나이가 들다보니 상좌들을 두고 시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무리하게 시켰다하면 이날 전부 몸살을 해서 야단들입니다. 나는 노장님 만큼 마음이 독하지 못해 그냥 살살 좀 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스승노릇하기도 쉬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일어납니다.

3. 대승사 묘적암 시절
내가 젊어서 공부한 경험당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내가 33세 때(1957년) 일입니다. 우스운 것을 보아도 우습지도 않고 좋은 것을 봐도 좋은줄 모르겠고 늘 밥 먹고 체한 것 같이 가슴이 어뭉하고 뭔가 걸린 듯이 시원찮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그 때 마침 성철 노장님도 안정사 천제굴에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암자 삥둘러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조망을 치고 당신이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해드린 다음 천제. 만수. 상열수좌에게 시봉을 맡기고는 나는 문경 대승사로 혼자 공부를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묘적암에 들어가보니 쌀이 한 두어가마니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랫마을 전두리라는 곳에 칠성계원이 50여명이 이 암자의 신도라고 했습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가는 안되겠다 싶어서 내가 저 쌀이 다 떨어지기 전에 공부를 마치든지 결과가 시원한 꼴이 안나면 죽든지 둘중에 하나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칠성계원이고 뭐고 일체 출입을 못하도록 문을 잠구어 버렸습니다. 내가 산에 갈 때나 문을 열지 그 외는 아무도 문을 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살면서 밥을 하루에 세끼 씩 해먹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귀찮은 것도 귀찮은 일이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공부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밥을 한 다섯되쯤 해놓고 양동이에다가 퍼서 방구석에 두고 그 옆에는 김치단지를 하나 같다놓았습니다. 그리고 양재기와 숟가락을 갖다놓았습니다. 겨울인지라 찬밥을 양재기에 떠서 김치조각 하나 놓고 대충 먹고는 우물가에서 찬물 한모금 먹는게 공양의 전부였습니다. 양재기고 수저고 일체 씻지도 않았습니다. 더럽느니 깨끗하니 하는 것도 다 쓸데없는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을 사람이니 얼굴을 씻고 말고도 할 것이 없었습니다. 발도 안씻고 방안 소지도 안하고 마지 올리는 종 등 일체 의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무는 하루에 한짐씩 운동삼아 했습니다. 나무도 생나무를 베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산판하고 남은 등걸만 톱질해서 모아 부엌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은 냉기만 가시게 하는 정도로 불은 조금만 때었습니다. 더우면 게으른 생각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불도 베게도 다 없애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한 삼개월 이상 살았습니다. 그 아래 윤필암에 비구니 스님들이 살고 있었는데 ‘내가 혼자 살고 있으니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종을 칠 테니까 그 때는 한번 올라와달라’고 부탁을 해놓은 터 였습니다.

석달이상 청소를 하지않은지라 아침에 해가 뜰 때는 앉은 자리에서 보면 윗목에 쌓인 먼지가 눈이 살짝 온 것 같았습니다. 포행한 곳은 눈내린데 발자국이 새겨진 것 같이 보였습니다. 얼굴을 석달이상 씻지 않아도 씻고 분粉 바른 사람이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밥그릇을 씻지않고 그대로 먹어도 더럽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위생이니 병균이니 하는 것도 아무 소용없는 소리였습니다. 발도 씻지 않았고 그저 눈을 뜨면 얼굴 한번 손으로 부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한번은 한밤중에 윤필암에서 비구니 스님들 한 무리가 들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종소리가 나길래 무슨 일이 있는줄 알고 왔다’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종을 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치만 나는 그 때 순두부를 아주 좋아 했습니다. 그 스님들이 올라 오면서 순두부를 5되짜리 커다란 차관에다가 가득 담아서 가져온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발 맛있게 먹고난 뒤 그 나머지를 방 위쪽 구석의 삼각탁자 위에다가 두었습니다. 겨울인데다가 방에 불을 적게 넣어 상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윤필암 스님들은 내려갔고 나는 또 좌복위에 앉았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하루는 그 차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순두부 생각이 나길래 한사발 먹을려고 다가가서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미 곰팡이가 새까맣게 나버린 뒤 였습니다. 겨울이고 또 방이 차가운지라 몇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4. 파계사 성전암 시절
그렇게 정진하던 중 마음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 파계사 성전암으로 노장님을 찾아 갔습니다. 오후에 저물게 나선지라 밤중이 되어 대구 동명 뒷쪽을 거쳐 성전암으로 들어가는 산길의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침 눈이 내렸고 석달이상을 하루에 찬밥 한덩이로 지내고 난 뒤라 허기가 들었는지 산을 올라가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걸음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린애 걸음마 같아 한 시간이면 갈길을 세시간 이상 걸려 겨우 겨우 올라 갔습니다. 솔잎 따먹고 눈雪 씹고 솔잎 따먹고 눈 씹으면서 힘들면 주저앉아서 쉬다가 가니 밤 12시나 되어서 성전암에 도착했습니다. 철망이 쳐져 있길래 그것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래도 철망 뛰어넘을 힘은 어디선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암 마당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목소리가 본래 좀 컵니다. 한밤중에 온 팔공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몇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다음에 문을 열고 노장님 방으로 들어가서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꿀물을 타다 주길래 마시고 조금 쉰 다음에 점검을 받게 되었습니다.

“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닛고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
“시전屍前에 주삼작酒三酌이니라.
죽은 사람 앞에 술이 석잔입니다. ”
“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닛고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냐?”
“창천蒼天 창천蒼天이로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

그리고는 바로 일어나 뚜벅뚜벅 방안을 걸으면서 또 한마디 일렀습니다.
일월日月이 동서별東西別하니
좌인坐人이 기이행起而行이라.
일월이 동서를 분별하니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 가더라.

예전에는 공부하다가 깨친다던가 득력得力을 하면 파참재罷參齋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수행을 완성하여 스승의 지도를 면제받는 의식으로 떡을 해먹었습니다. 노장님이 ‘파참재 떡을 오늘 해주겠다.’라고 하시길래 ‘싫다’고 했습니다. 나는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계사 큰절 금당에 있으면서 성전암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더욱 정진을 하였습니다.

5. 태백산 홍제사 토굴시절
그 뒤 태백산 홍제사 골짜기의 토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출격장부로서 장부답게 멋지게 한법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가장 높은 산을 수미산須彌山이라고 하고 가장 깊은 바다를 향수해香水海라고 부릅니다. 생각해보니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가 내 몸을 은둔시키고 세상을 훤히 내다보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미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큰 수미산이 내 그 작은 엉덩이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안되겠다 싶어서 향수해 바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바다 역시 내 발바닥 밑으로 감추어져 버리는 것이였습니다. 내 발바닥 속에 파묻쳐 보이지를 않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내가 살 곳이 아니였습니다. 그 때 바로 한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우리는 보통 탐진치 貪嗔癡 삼독三毒을 없애야 성불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탐진치 그 자체가 바로 나 였습니다. 탐진치가 있기에 나我라는 존재가 있고 탐진치가 없어지면 나 我라는 존재가 없어질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탐진치 속에서 영원히 한번 살아보자고 했습니다. 알고보니 탐심이 제일 많고 진심嗔心이 제일 많고 치심이 제일 많은 그 놈이 바로 나 였던 것입니다.
상당법문 소참법문 속에서 발췌정리
남동우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7-03-14 오후 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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