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회주 설산 스님이 3월 6일 오후 6시경 열반에 들었다.
올해 법랍 75년, 세수 90세인 설산 스님은 1919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했으며 15세 때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산 스님을 은사로, 계허 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
건봉사 강원과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 한암 스님 회상에서 참선수도했다.
조계종 초대종정인 청담 스님의 수법제자로 법맥을 계승하고 조계종 중앙종회의원과 건봉사 주지, 도선사 실달학원 원장, 한국정토학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지옥을 불태워버려라> <뚜껑없는 조선역사> <구름에 달가듯이> 등이 있다. 건봉사에서 염불만일기도를 회향하기도 했다.
설산 스님의 상좌로는 응천, 응초, 응관 스님 등이 있으며 손상좌로는 자성, 진경, 진송, 진휴, 진율 스님 등이 있다.
영결식은 3월 9일 오전 10시, 입적지인 정토사에서 봉행될 예정이다. 설산 스님 문도회 응천 스님 010-4789-3405
다음은 설산 스님의 지난 법문.
574호 [2006-04-19]
큰스님 편안하십니까-설산 스님 (염불만일회 법주)
일평생 염불수행 일상이 삼매
| |||
며칠전 내린 봄비로 개나리와 철쭉이 삼각산에 가득했다. 삼각산의 봄 내음이 사람들의 마음까지 맑게 하는 것 같았다. 초행이라 도량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서울 평창동 마을 어귀를 지나는 순간 정토사라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가는 조그마한 마을길을 따라 삼각산 중턱으로 올라서자 불사가 한창인 정토사가 반겼다.
前 태안사 조실 청화 스님과 함께 염불 수행의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설산(雪山) 스님. 선지식이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려서일까, 불사가 한창인 도심사찰 정토사를 보는 순간 다소 낮선 느낌이 들었다.
공사 자재를 피해 겨우 법당으로 올라가 삼배를 하고 스님이 기거하시는 아래층 요사채로 들어가자 설산 스님은 문 앞 소파에 앉아 반갑게 맞아 주었다. 8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얼굴은 마치 어린 아이 같이 해맑았다.
삼배를 마치고 큰스님에게 법문 한마디 듣고 싶어서 왔다고 여쭙자 “법문이 뭐 별건가, 얼굴 한번 보고 가면 되지” 하며 연신 웃으신다.
스님의 뵙자마자 어떻게 평생을 염불만 하고 살아오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마음 한켠에서 불쑥 솟아났다. 먼저 스님께 어떻게 염불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물었다.
“15세 나이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는데 당시 건봉사에는 강원과 염불방, 참선방이 다 있었어요. 강원에서 조용히 경전을 읽는데 ‘쿵’하는 소리가 나서 염불방에 가보니 10여명의 스님들이 염불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마음이 자꾸 그 염불 소리를 좇아 가는거야. 그래서 염불로 불법을 전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염불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벌써 한평생이 되었네요.”
설산 스님은 건봉사 강원을 졸업하고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한암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참선 수행을 시작해 10하안거를 성만했다. 한국전쟁으로 건봉사가 폐사되자 이곳 삼각산 자락에 정토사를 세우고 염불 수행에 매진해왔다.
1974년, 1만일 염불 수행의 서원을 세운 스님은 매일 일념으로 염불을 해 오셨다. 27년동안 한번도 거름없이 염불을 해 만일을 회향하고 나서, 2001년 10월 건봉사에서 다시 만일 염불 정진에 돌입했다.
설산 스님의 하루는 여느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새벽 4시에 시작된다. 그러나 사중 스님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 워낙 고령이어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데다 정토사 주지 응천 스님이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만이라도 요사에 머무르시라는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스님은 예불 시간에 요사에서 염불 수행을 하신다.
설산 스님이 방으로 들어가자고 해 처소로 자리를 옮겼다.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자는 당황스러웠다. 방은 한명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았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벽에 걸린 관세음보살도와 서가, 조그마한 간이 책상, 바구니 안에 놓인 천알 염주와 거북이 목각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새벽 4시~5시, 저녁 6시~7시 매일 두차례 지극정성으로 염불 수행을 한다. 수행 방법도 특이하다. 정좌를 한 다음 간이 책상위 거북이 목각과 천알 염주를 가지런히 놓고 염주를 한알 한알 돌리며 입과 마음으로 칭명 염불을 한다. 천번을 다 돌리면 염주와 거북이를 정리한 다음 다시 반복한다.
하루에 두 번 염불을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중생심이다. 스님은 밥 먹을때나 화장실을 갈 때도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놓는 법이 없다. 말하자면 하루 종일 염불을 하는 것이다.
저녁 6시 아미타부처님에게 염불을 한다는 것을 고한 이후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며 염주를 돌리는 스님의 모습에서 웬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염불 수행을 하는 틈틈이 설산 스님은 만해 스님의 자료를 정리한다. 고성 건봉사에서 만해 스님으로부터 직접 경전을 배웠고 누구보다도 만해 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다. 그래서 이생을 마감하기 전에 만해 스님의 자료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스님으로서의 만해 스님을 불자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서다. 스님은 만해 스님에게 보내는 존경의 염이 넘쳐흘러 그동안 ‘산거’ 등 여러편의 시를 지었다.
설산 스님은 왼쪽 발가락이 하나 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에 학도병으로 끌려 갈수 없다는 항거의 표시로 스스로 네 발가락을 잘랐기 때문이다. 60여년을 절뚝이며 살아왔지만 스님은 만해 스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음을 지어보이신다. 특별히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스님의 성치 않은 다리에서 민족의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책꽃이 앞에서 만해 스님 자료를 정리하다가 스님은 <지옥을 불태워 버려라>는 제목을 책을 기자에게 내밀었다. 청담스님의 탄신 100주년 기념으로 편찬한 책이다. 스님은 청담 스님을 은사로 불교 정화 운동에 동참하는 등 굴곡의 한국 불교와 함께 해 왔다. 특히 청담 스님이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재임할 당시 스님의 수법제자가 되어 종단화합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은 고령에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지팡이와 벽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거동이 불편한 스님. 그러나 아직까지 염불하는데는 지장이 없다며 웃음을 지어보이시는 모습에서 정토에 활짝 핀 연꽃이 연상되었다.
| |||
설산 스님은
1919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설산 스님은 15세에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건봉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건봉사 공비생(公費生)’으로 선발되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청담 스님의 수법제자로 종회의원, 건봉사 주지 등을 역임했고 실달학원 원장을 맡아 후학지도와 수행교화에 헌신해 왔다.
현재 삼각산 정토사에 주석하고 계시며 저서로는 회고록 <뚜껑없는 조선 역사책>과 사찰 안내서 <명찰 고찰 따라> 등 다수가 있다.
설산 스님은 경율론 삼장은 물론 선지에도 밝고 실천하는 수행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토사 주지 응찬 스님은 “큰스님을 보면 부처님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평생을 한결같이 염불 수행을 해 오신 스님의 실천행이 우리같은 후학들에게는 사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설산 스님의 가르침
저는 평생 염불 수행을 한 사람이라 법문을 하라니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염불 수행을 하라는 법문은 많이 했으니 오늘은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연(因緣)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인연의 참된 뜻을 알고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연은 인(因)과 연(緣)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은 한마디로 업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과거의 업보에 의해 오늘의 내가 모양 지어졌기 때문이죠.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중생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연은 후천적 노력이라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친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먼저 전화도 하고 맛난 음식을 같이 먹는 등 서로가 노력했기 때문에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인의 영역이라 하겠습니다. 후천적 노력이 없다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관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생에 수백겁의 인연이 있고 업식이 쌓여서 금생에 옷깃을 스치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이지요.
| |||
불교는 인연법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현상이 서로 인연이 되어 서로 의존하며 존재합니다. 이같은 존재 방식을 연기(緣起) 또는 인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기의 이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윤회 전생의 연자방아가 도는 것처럼, 생사고해에서 헤매며 하루밤에도 수 천 번 죽고 태어나는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다. 이같은 인과응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행정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선방에 앉아 연기법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인생을 걸고 용맹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참선, 염불, 절, 사경 등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저는 염불을 평생 수행으로 살아왔습니다. 염불이야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또 하게 되네요.
“사리불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미타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명호를 외우면 산란한 마음이 사라지고 아미타불과 여러 성중(聖衆)들이 나타나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만큼 염불의 공덕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집에서 한번 염불을 해 보십시오. 돈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단 1초를 염불하더라도 지극정성으로 다른 생각 말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명호를 불러 보세요. 그 1초가 바로 극락입니다.
또한 1초가 다시 1초로 거듭나면 그것이 바로 염불 삼매의 경지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10만독, 20만독을 하는 것보다 지성으로 1초를 호명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클 수 있습니다. 염불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보다 얼마나 정성을 들이며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불 수행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쉽게 일상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염불입니다. 집에서 밥 할 때나 지하철을 탈 때도 한마음으로 염불을 해 보십시오. 해와 달이 뜨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듯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면 몸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금강같이 단단해 집니다.
입으로 소리내어 칭명 염불을 하는 것도 좋은 수행법이지만 마음속으로 칭명을 하는 것도 염불 수행의 좋은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매일 아침 시간을 정해 놓고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1만번씩만 해 보십시오. 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아침 염불을 하기 위해서 저녁에 일찍 자야 할 것이고 일찍 자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하루 일과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더 알차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염불 공덕도 쌓고 스스로 생활의 변화를 가져와 매일매일 살아있는 참된 불자가 될 것입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을 호명하면 극락에 간다고 많이들 믿고 있습니다. 저도 건봉사 염불방에서 처음으로 염불을 배울때 그렇게 들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인지라 그것이 극락인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관세음보살 염불을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다보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바로 연기의 도리를 깨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깨침의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임을 관세음보살이 알려줍니다.
다소 뚱딴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평생을 염불 수행한 저는 매일매일 관세음보살의 소리를 듣고 삽니다. 관세음보살을 지극정성으로 불러보면 관세음보살이 분명 극락세계를 일러 주실 것입니다. 열심히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 보세요.
참선을 중요시하는 한국불교의 특성상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이 최상의 수행법이라고 많은 불자들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염불을 기복 신앙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염불 정진은 불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불심을 더 돈독하게 하는 정토 신앙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참선과 같은 하나의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진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한번 부처님의 명호를 몸과 마음으로 호명해 보세요.
457호 [2004-01-21]
설산스님(전국염불만일회 법주)
허상의 그림자 벗어나려면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라
| |||
“서울에 살고 있는 1천만 인구 중에 극락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서울 평창동 삼각산 정토사에 주석하고 계신 설산 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자 대뜸 스님은 이런 물음을 던지셨다.
“현대의 첨단 과학 문명은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정작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허상의 그림자에 속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만든 본질은 보지 못하고 허상의 그림자에 속아 살고 있다 그 소립니다. 불교는 이러한 중생의 아픔을 제거하고 해탈의 세계로 이끌어 참 행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극락은 무엇일까요? 허상에 속지 않고 자연 그대로, 순리 그대로 생활하는 것이 부처님 세계요 극락입니다. 그렇다면 극락세계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곳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염불입니다. 염불은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30여 년 넘게 염불수행에 매진해 온 스님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돈과 명예를 좇으며 하루하루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우리네 삶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을 것이다.
“하루 24시간,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자기 무릎이라도 한 번 꼬집어 주십시오. ‘아프다’고 느끼는 그 순간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자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십명왕생(十名往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름을 10번만 부르면 극락에 간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 말의 참뜻은 염불하는 방법만은 알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단 1분 1초라도 다른 생각 말고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그 1초가 바로 극락이며, 1초가 다시 1초를 거듭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염불삼매입니다. 여러분들도 염불을 걸으면서도 하고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하고 지하철에 앉아 있으면서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많이 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어 스님은 염불의 장점과 공덕을 하나하나 짚어 주셨다.
“일단 염불은 밑천이 안들잖아요?(웃음) 또 염불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됩니다. 하지만 염불하면서 ‘무엇을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세계에 들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같은 시간에 염불해 보세요. 해와 달이 뜨는 것이 변하지 않듯, 몸과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미타경>에 이런 말이 나와요.
‘사리불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명호를 외우되 하루나 이틀 내지, 혹은 7일간 일심으로 산란하지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 임해 아미타불과 여러 성중(聖衆)들이 나타나 극락국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염불에는 크나큰 공덕이 있습니다.”
스님에게는 요즘 한 가지 걱정이 있다. 바로 염불수행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염불을 하려는 불자들은 많은데 가르침을 배울만한 곳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일각에서는 염불을 기복신앙으로 여기거나 참선보다 낮은 수행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염불정진은 불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면서 불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정토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얼마 전 열반한 청화 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염불 수행의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설산 스님은 어떻게 염불수행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을까?
“14살에 염불왕생극락 발원의 중심도량인 건봉사에 들어가서 사미 생활을 했어요. 그때 강원과 염불방, 참선방이 따로 있었는데 강원에서 경전을 읽다보면 조용한 가운데 ‘쿵’하는 소리가 났어요. 마음이 이 소리를 자꾸 쫓아가요. 그게 바로 염불하는 소리였어요. 이후 염불로 불법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이후 한국전쟁으로 건봉사가 폐사되자 스님은 이곳에 정토사를 세우고 염불수행에 매진했다. 1974년 1만일 염불수행을 서원한 스님은 매일 새벽 4~5시와 오후 6~7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염불 일념에 들었다. 2001년 10월 만일염불정진을 회향한 스님은 이듬해 다시 만일염불 입제에 돌입했다. 건봉사에서 250여 명의 재가불자들과 함께 만일염불정진을 발원한 것이다. 평생을 염불수행에 매진하고 대중들에게 이를 널리 펼치겠다는 스님의 마음이 담긴 발원이다.
스님의 왼쪽 발에는 발톱이 하나 밖에 없다. 발톱이 붙어있어야 할 다른 네 발가락은 스님이 스스로 잘라버렸다. 일제의 학병에 끌려갈 수 없다는 항거의 표시였다. 사람들이 스님의 성치 않은 다리에서 지난 역사의 비애를 읽는 것도 이 때문이다. 60여 년을 절뚝이며 살아왔으니, 오른쪽 다리인들 편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제 지팡이와 벽을 의지하지 않고는 걸음을 옮기기 힘들지만 “아직 염불하는데 지장이 없으니 건강하다”는 것이다.
“늙어서 그런지 낮잠도 많아 졌다”고는 하지만 매일 5시에 일어나 염불로 하루를 여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최근에는 스님이 ‘조선의 아버지’라고 여기는 만해 스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만해 스님에 관한 대부분의 글이 스님의 시에만 초점을 맞춘 것 같다”며 “나는 스님의 일대기를 쓰고 싶다”는 것이다.
“요즘은 부쩍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만해 스님에 얽힌 이야기들을 쓰느라 더 그렇겠지만 내가 보고 자란 건봉사의 산과 바위와 나무가 자꾸 떠오르는데 그게 그렇게 정겹게 다가올 수가 없어.”
만해 스님 일대기를 쓰는 것 외에 시(詩)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스님이지만, 건봉사가 생각날 때면 읊조린다는 시 한 수를 들려주셨다.
낮달이 걸려 있는 소나무 가지 바위 아래
주리면 열매 따고 풀섶으로 바람 비 가려
옹달샘에 달빛 움켜 마시면 저 멀리
도솔천 별빛이 진주알처럼 흩어진다
연(緣)은 무상(無常)이요, 정(情)은 환멸(幻滅)인데
산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없다오
-스님의 시 ‘산거(山居)’ 전문
“우리는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머무는 이 곳이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저는 염불을 하기 때문에 만족합니다. 염불을 통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이 곳이 바로 극락이지요.”
| |||
북·징 두드리며 하루 세차례 염불
설산 스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세 번, 새벽 5시와 오전 11시 10분, 저녁 6시에 각각 20~40분씩 염불 수행에 매진한다. 스님은 염불을 할 때 번뇌와 잡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북과 징을 이용한다. 전통 염불법에 따라 앉은자리 왼쪽에는 북을 앞에는 징을 놓고 아미타불을 호명한다.
“쇠를 치는 것은 불가에서 지옥문을 여는 것을 상징합니다. 염불을 해서 지옥문을 열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것이지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북을 치는 것은 고통 받는 축생의 육신을 모두 쉬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염불하면 새소리 나면 새소리를 쫓고 바람소리 나면 바람소리를 쫓게 되고 잠도 쉽게 오는데 그걸 막기 위해서 북과 징을 치는 것입니다.”
스님은 염불할 때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고 북과 징을 치는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마음이 염불의 전부”라는 스님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관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을 한다. <관무량수불경>에 나오는 극락세계 직관방법인 ‘일상관(日想觀, 서쪽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일념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염불을 시작하고 끝낼 때는 머리를 조아려 “아미타부처님 예를 드리오니 높으신 부처님 아미타부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극락세계 가도록 인도해 주소서”하고 기도를 올린다.
“언제 어디서나 염불한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염불을 지극히 하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돌도 개울도 만나는 사람도 모두 부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