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반복되는 가운데, 마치 쥐가 소뿔에 들어가듯, 뿔의 끝이 좁듯이 번뇌의 소진되는 폭도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도 적게들려 복도에 있는 시계바늘 소리마저 들린다.”
“주인공아, 너 혹시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느냐?, 아닙니다. 단지 화두 챙기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혹시 화두가 달아나 버릴까 걸음도 빨리 걷지 않고 정(定)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번뇌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맑은 거울에 비친 티끌과 같이 훤히 보입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어느 한 수좌스님의 무문관 수행일기중 일부다. 무문관(無門關)?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지 모르는 무문관은 선방의 일종인데, 장소적 개념보다는 그곳에서 행하는 수좌 스님들의 무문관 수행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깨닫지 못하면 문밖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물쇠를 잠군 독방에서 수년간 바깥세상과 절연하고 화두 참구하며 용맹정진하는 참선법중 하나다. 한국 선(禪)의 용맹정진하는 기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행법이기도 하다. ‘무문’에는 문이 없어 어디로도 통하는 대도(大道)의 문은 찾기 어렵다는 의미와 문 아닌 곳이 없어 시방세계가 그대로 ‘무문’이라는 이중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무문관이 주무대인 이 책은 그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못했던 무문관의 의미와 역사를 비롯해 그 수행일기와 현장, 무문관을 투과한 고승들의 수행역정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무문관’이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64년 도봉산 천축사에서 정영 스님이 ‘무문관’이라는 참선수행도량을 세우면서 부터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이후 65년부터 79년까지 매회 6년간 현대의 고승들이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걸고 면벽 수행했던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은 79년 원공 스님을 마지막 수행자로 문을 닫았지만(현재는 시민선방으로 운영), 93년 계룡산 대자암에서 다시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뒤이어 제주도 남국선원(94년), 설악산 무금선원(98년), 강진 백련사 만덕선원(2002년), 천성산 조계암(2004년), 감포 영남불교대학 무일선원(2005년)에도 무문관이 잇달아 생겨나면서 무문관 수행이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됐으며, 앞으로도 무문관은 늘어날 것이라고 저자는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2부 ‘무문관 수행일기’다.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수행자들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 한 수좌스님의 대리체험에 대한 생생한 기록들은 책장을 술술 넘기게 만든다.
무문관 수행일기는 남쪽의 모 선원 무문관에서 3년 7개월간 폐문 정진을 마치고 나온 한 수좌 스님이 온몸으로 병고(病苦)를 이겨내며 쓴 생생한 참선 수행 기록이다. 수행일기는 이중 약 10개월 동안의 무문관 생활에서 겪은 소박한 이야기와 참선 중에 겪은 내면의 체험을 가감없이 적어 놓았다. 하지만 수행일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록의 양이 짧아지고 급기야는 10개월 만에 중단된다. 이는 모든 언어와 문자를 초월해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행자의 사교입선(捨敎入禪:교학을 잊고 선(禪)의 경지에 들다)의 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당초 수행일기를 쓴 수좌스님은 이 일기를 공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무문관 수행에 대한 기록물이 전무해 새로 무문관에 들어가는 수행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과 불교계 내외의 무문관 수행에 대한 높은 관심을 부분적으로 나마 소개해야 한다는 저자의 끈질긴 설득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때문에 책에는 수좌스님의 법명을 ‘무명(無名) 스님’이란 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저자가 스님을 처음 만난것은 지난해 여름 부산에서였다. 스님은 3년 7개월간 무문관에서 묵언(?言) 수행한 탓에 말문이 잘 터지지 않아 대화하는데 애를 먹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하지만 형형한 눈빛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청정한 기운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함께 닦은 수행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고 저자는 덧붙였다.
이외에도 이 책의 마지막 4부 ‘문없는 문을 투과한 고승들’에서는 무문관 수행으로 생사의 관문을 투과한 고승들의 삶과 깨달음을 조명했다. ‘콧구멍 없는 소’가 된 경허 스님, 토굴에서 ‘무(無)’자 타파한 효봉 스님, ‘이뭣고’ 타파로 대문(大門) 빗장 연 경봉 스님,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한 성철 스님, 50년 장좌불와(長坐不臥)한 청화 스님 등 근ㆍ현대 고승들의 구도역정은 초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현대불교신문사 수행전문기자로 11년간 일해온 녹록지 않은 필자의 피와땀으로 활짝 열어 젖혔던 문 없는 문의 빗장을 다시 굳게 닫고 나면 역시 깨달음이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문없는 문, 빗장을 열다>
김성우 엮음
클리어마인드 펴냄/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