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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시를 하나로 품어야 ‘참 사람’
[신년인터뷰]송준영 시인
새해에 선시 이론과 작시법 체계 세우기를 발원한 송준영 시인.
정해년 새해에도 선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보다 큰 폭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몇 년간 선시(禪詩)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점차 가열돼 왔다. 그러나 이제 관심의 범주를 벗어나 문예지들이 앞 다투어 선시 관련 특집을 다루는 등 선시가 새롭게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그러나 선시에 대한 관심만 팽배할 뿐, ‘문학 이론’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

반면, 선의 세계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 보편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시를 둘러 싼 담론이 전개되는데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선의 본질적인 목적은 ‘시를 쓰는 것’에 있지 않고 인간이 갖추고 있는 ‘본래면목(佛性)’을 깨치는데 있으며 선시는 그 깨침의 경지를 노래로 드러내 보이거나 그 길을 안내하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 방편을 문학이론에 대입해 해석하는 것이 낳을 수 있는 오류의 가능성은 문학에서 선시를 대하는데 매우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는 선시를 문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선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결론으로 통한다.

우리시대의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해 진리를 구하고 마침내 백양사 방장이었던 서옹 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재가 선객. 40년이 넘도록 선 수행을 해 온 송준영(61·계간 <시와세계> 발행인) 시인이 지난해 가을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를 펴내 주목 받은 바 있다. 새해 회갑을 맞은 송 시인은 “나를 의심이 끊어진 자리로 인도해 주신 여러 스승님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제 여생을 선시 연구와 보급에 매진할 것”이라는 발원으로 새해를 맞았다. 신년 벽두(1월 2일) 강릉 중앙시장 한 복판에 위치한 <시와세계> 사무실에서 송 시인을 만났다.

▲최근 펴내신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는 그간 선시에 대한 문단의 관심을 총 결산 한 느낌을 줄 정도로 스케일이 큰 노작입니다. 이 책을 쓰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요?

-5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을 부여 받고 절박한 심정으로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열여덟 살 때 영주 부석사에서 발심한 이후, 마흔을 넘어 서옹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습니다. 선 수행과 문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시를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시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생사를 걸고 선의 문을 두드린 사람만 알 수 있는 일물 (一物)이 있습니다. 유일물(有一物)이 빠진 상태에서 선시를 재단하는 것은 사구(死句)를 한 번 더 죽이는 꼴이랄까요? 제가 본 조사들의 게송을 보다 활발하게 풀어 보고 그 의미를 여러 사람과 함께 이해하며, 혹 ‘아하’하고 무릎을 치는 풍광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이 책을 내게 하였습니다.

▲선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선시는 내용상으로는 선사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언어양식을 말하겠지요. 곧 선수행자들의 선적 체험, 선수행으로 체득된 오도의 경지를 표현한 시입니다.

선시의 수사법으로는 압축, 절연, 기상, 모순, 병치, 사물의 가탁에 의한 형상화 등 현대시의 수사법과 거의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특히 선시에서 종횡무진으로 나타나는 수사법은 모순적 어법입니다. 세분하면 선시의 반상합도(反常合道), 초월은유(超越隱喩), 무한실상(無限實相)이 그것이지요.

선시의 반상합도란 우리가 정상이라 규정하는 일상을 돌이키고 뒤틀어서 정상과 비정상이 융통하고 회감하여 수승된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수많은 선시가 거의 이런 수사법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습니다. 부대사가 노래한 “빈손에 호미들고”나 “다리는 흘러가고 물은 흐리지 않네”하는 시구와 조선시대 소요 태능의 “물위에 진흙소가 달빛을 밭 간다/구름 속 나무말이 풍광을 밭 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세계야말로 바로 선사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반상합도에 의한 빼어난 세계이지요.

다음, 선시의 초월은유는 이질적인 두 사물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비유, 곧 비동일성에서 동일성을 발견하게 하는 은유를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선시의 반상합도에서 나타나듯이 ‘A는 A가 아니므로 A이다’라는 선시의 모순어법을 바탕으로 선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양변의 견해를 융합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비유상태를 말합니다. 서산대사의 “진흙은 푸른 돌 속의 뼈”나 조선 말 무경선사의 게송인 “일이삼사로 가고/사삼이일로 오라”와 같은 시행은 선문답적인 초월은유입니다.

마지막, 선시의 무한실상이란, 서구의 상징주의자들은 일체 현상세계가 허구세계이며, 궁극적으로 상징세계로 간주합니다. 선의 입장에서는 이 서구의 상징이란 바로 색이나 가상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일체의 만물을 뜻합니다. 곧 공(空) 실상(實相) 본체(本體) 본성(本性)과는 상대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단어입니다. 선에서는 정신/물질을 이원화 하지 않습니다. 곧 실상이란, 상징에 남아있는 논리적 고리를 단절시킴으로, 제자리로 환지본처하게 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표징일 뿐입니다. 따라서 선시는 많은 생각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직관시킬 뿐입니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 선시는 어떤 위치에 놓여 있습니까?

-김춘수 시인은 말년에 우리나라 당대 시들을 분류한 실천 비평서인 <김춘수사색사화집>을 냈습니다. 그는 한국의 시들을 4가지 유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전통 서정시의 계열. 둘째, 피지컬한 시의 계열. 셋째, 메시지가 강한 시의 계열. 넷째, 실험성이 강한 시의 계열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신라나 고려 때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적 역사가 이어지는 선시 계열은 어디로 갔는가? 혜심의 게송, 태고나 나옹의 선시, 서산과 경허의 우리 체형과 자연에 꼭 맞추어진 선시의 그 맛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의아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현 우리 문단에서는 그저 선시란 이름만 있고 선시의 문학사적 의의나 선시론은 어디에도 없으며, 수사법은 정리조차 되어있지 않고, 대략 선시의 수사나 선미는 위의 사색(四色)의 시들 속에 녹아 있을 뿐, 어떤 위치도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선이나 현대시에 대한 반상합도(反常合道)된 통찰의 시선과 집요한 전문가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우매한 질문이 되겠지만, 오늘날 ‘선시 작가’가 있다면 그는 깨달음의 체험을 했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시각에서 ‘선시 작가’를 규명할 코드가 있는지요?

-많은 이론과 주장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다’ 하고 통증 해야 하겠지만,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기의(의미)/기표(표현)’로 나눌 때, 의미상 완전히 선을 실참실수한 선객이어야 가능하며, 한 쪽으로는 동양의 시론과 정통적인 수사법에 밝아야 하며, 또 서구의 시론과 수사법에 의해 작시를 할 수 있는 분이라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내적으로 선불교에서 이르는 적조(寂照)가 동시(同時)임을 철증한 사람의 몫입니다. 외적으로는 동서양의 수사법으로 시를 작시하며 시론에 밝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선시의 종류를 선리시, 선취시 등으로 분류하여 왔습니다. 선도리에 밝으면 더 할 나위없겠지만, 앞서 얘기한 선미, 청량(淸凉) 명징(明徵) 단순(單純) 함이 시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선취시 풍이 오늘날 대다수 선시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가들도 광의의 선시인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선적인 삶’과 ‘시적인 삶’을 정리해 주신다면 거기서 ‘선시 같은 삶’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많은 분류 속에, 우리의 삶을 전성전일(全性全一)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확암 선사의 <십우도>에 ‘입전수수(入廛垂手)’란 말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문에서는 ‘이류동행(異類同行)’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동사섭의 보살도를 이르는 것이겠지요. ‘선적인 삶/시적인 삶’ 이런 양분된 사유 자체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 의해서지요. 우리 선문에서는 예전부터 이런 나눔은 없었습니다. 불이(不二)라 하지 않습니까?

잠시 서구의 형이상학의 이념적인 흐름을 짚어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Idia)나 데카르트의 사유주체(Cogito), 루소의 자연의 말(Logos), 헤겔의 관념론적 절대인식과 후설의 현상학의 의식주체와 직관 등 이 모든 철학적 체계는 지금의 형이상학의 주체를 형성한 전부입니다.

그러나 근세에 있어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라깡이나 데리다 등에 의해 이런 문제가 해체비평 되고 있고, 이것은 우리 선적 사유와 유사한 것이 발견되곤 합니다. 곧 형이상학론자들은 자기 동일성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두두물물이 존재한다고 보는 이분법적인 사유는 선문에서 말하는 분별간택심의 본향을 이르는 말이라 읽힙니다.

살펴보면 정신/물질, 자아/타자, 긍정/부정, 본질/응용, 적/조 이 모든 분별을 앞 쪽의 정신, 자아, 긍정, 본질, 적(寂)에 포인트를 두고 상호 차례가 관념적으로 합리화시킨 체계이지요. 그렇지만, 일찍이 6조 혜능스님은 상대적 관념을 모두 불이로 말했듯이 우리 선불교에서는 고요(寂)가 있고 다음에 되비침(照)이 있음이 아니라, 적조동시라 통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객/시인‘이 따로 있음이 아니라, 선객이면서 시인, 이것이 선시적인 불이의 삶일 것입니다.

▲새로 맞는 2007년은 큰 수술을 한 뒤 5년을 넘겨 ‘안전권’에 드는 해이고 회갑을 맞는 해이니 남다른 계획이 있으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서구적인 수사법을 배우고 익힌 것에, 선의 세계를 같은 문장과 언어 안에 만날 수 있도록 애쓴, 여러 시들을 묶어 시집을 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꼭 쓰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자생된 <선시론>입니다. 이에 관해 저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역대 한자로 쓰여진 선시를 ‘고전선시’, 근대에 이르러 한글로 쓰여진 선시, 즉 비교적 전통적인 수사법에 의한 ‘현대선시’와 서구의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사법으로 쓰여졌으나, 단순 청량 명징과 같은 고전선시에서 나타나는 선미가 풍기는 실험적인 시를 ‘전위선시’(Abant garde-Zen poetry)로 명명하고 당대 시인들의 시를 분류하여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더욱 체계 있는 <선시론>을 출간할까 합니다.

임연태 기자 | ytlim@buddhapia.com
2007-01-10 오전 9: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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