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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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서원으로" 저팔계 닮으면 행복해져
[신년특집]성태용 교수 기고
돼지는 묘한 짐승이다. “너는 돼지 같다”고 하면 누구나 화를 낼 것이다. 그런데 돼지꿈을 꾸라 하면 좋아한다. 또 고사를 지내거나 할 때는 돼지 머리 앞에 절을 한다. 죽으면서도 웃는 표정을 지은 돼지 머리 앞에~ . 자기가 그렇다는 건 인정할 수 없지만 묘한 주술적 힘을 지니고 있어 재수를 불러들이는 돼지…. 돼지란 동물이 어떻기에 이런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돼지 가운데 가장 스타(?)로 부상한 것은 저팔계일 것이다. <서유기>에 등장하여, 힘은 강하지만 먹을 것과 여자를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고질병 때문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그래서 우리에게 친근한 느낌과 웃음을 주는 존재가 바로 저팔계이다. 바로 이 저팔계라는 상징 속에 돼지가 가진 이중적 의미가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유기는 단순한 공상소설이 아니라 현장 삼장의 인도 구법여행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 수많은 상징과 은유를 섞어서 불법 수행의 과정의 시작과 끝을 드러낸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탐욕을 상징하는 돼지로 형상화되고, 그러면서도 불경을 구하는 고난의 역정에 함께하여 결국 그 큰 목적을 이루는 돼지 저팔계의 모습을 한번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디 저팔계는 하늘세계에서 벼슬을 하던 이였고, 본디 돼지 모습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은하수를 관리하는 천상의 관리였다. 죄를 짓고 하계로 추방되면서 재수 없이 돼지탈을 뒤집어 쓴 것일 뿐이다. 죄를 짓고 추방되었다는 사실이 저팔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본디는 귀한 존재였다는, 그러나 지금은 보기 싫은 탈을 쓰고 있다는 이중적 의미가 이미 이 속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저팔계는 팔계(八戒)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삼장법사의 수행원이 되면서 받은 본디 법명은 오능(悟能)이다. 손오공(孫悟空), 사오정(沙悟淨)과 더불어 오(悟)자 돌림이다. 손오공이 공(空)의 진리를 깨달아 지혜를 성취하고, 사오정이 맑음[淨]을 깨달아 정(定)을 성취한다면 저팔계는 자신이 지닌 능력을 깨달아 힘을 성취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기에 계율을 지켜 이루어야 한다는 뜻에서 팔계라는 이름이 따로 붙었을 따름이다. 깨닫지 못하면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이지만 깨달음을 통해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이룬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이 속에 절묘하게 녹아 있다.

돼지 모습을 한 저오능과 저팔계라는 두 이름을 지닌 존재, 이 속에 돼지로 형상화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깊은 통찰이 숨어 있다. 보통 탐욕은 부정적인 것으로, 추악한 것으로 말해진다. 서유기 속에서 탐욕 때문에 수많은 사고를 치는 저팔계의 모습 속에 그러한 측면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하기에 탐욕은 경계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끊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물어보자. “탐욕을 완전히 끊는다면 당신은 무슨 힘으로 살아가려 하십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몰고 나가는 근원적인 힘은 바로 욕망이 아닐까? 그 욕망을 끊고 나면 우리는 무슨 힘으로 살 것인가? 남들은 욕망의 추구를 통해 많은 것을 성취하여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야!” 하면서 손가락 빨고 있을 것인가? 아니 손가락도 빨면 안 되겠지. 그것도 일종의 욕구불만을 표현하는 짓이니까! 이 사회 속에서 그렇게 욕망에 초연하면서 혼자 고상한 경지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 될 수 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니 혼자만의 이상 추구라면 그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면, 쉽게 말해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욕망에 초연하다 보니 현실사회에서는 일종의 낙오자 그룹으로 전락한다면? 좀 곤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 현실 속의 불자들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불자들이라고 해서 낙오자 그룹은 아니다. 그들은 현실문제에 대하여는 열심히 욕망을 추구하기도 하여 크게 성공한 이들도 많다. 그러한 불자들도 절이나 법회에 가서는 열심히 탐욕을 끊은 가르침을 배우고, 또 탐욕을 끊는 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로 돌아가서는 또 열심히 욕망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산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니까, 현실 사회에서는 할 수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그렇게 잘못 산만큼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 그 업을 씻고... .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불자의 삶인가? 좀 곤란한 이야기이다.

그 곤란함을 해소하는 절묘한 상징이 바로 저팔계이다. 그 부정적인 모습을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라는 것이 지닌 힘을 깨닫고,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는 계율을 통해 그 힘이 올바르게 드러나도록 이끌어 가는 과정이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힘에,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힘이 따로 있을까? 악을 지향하려는 힘, 선을 지향하려는 힘. 오욕락을 추구하려는 욕망의 힘, 불도를 성취하려는 서원의 힘. 그런 것이 각각 따로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방해가 되는 한쪽의 힘은 완전히 끊어 없애야 옳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굳이 ‘둘이 아닌[不二] 법문’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저팔계가 그렇게 사고를 치면서도 끝내 삼장법사를 수행하여 불경을 구해오는 일을 온전히 마치고, 결국은 부처를 이룬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본디 천상의 관리였듯이 본디 나쁜 존재가 아니요, 또 없어서도 안 될 존재이다. 문제야 많이 일으키지만 그 욕망이라는 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을 추진해 나갈 어떤 다른 힘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저팔계가 수없이 문제를 일으키면서도 결국 구법의 여행을 온전히 마치는 것은, 욕망이라는 길들여지지 않은 힘을 돌이켜 서원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세속적 삶은 욕망추구로, 그렇게 해서 오염된 삶을 불법 수행을 통해 정화시키고 하는 이중적 삶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 길은 바로 욕망에 따라 살던 삶을 서원이 이끄는 삶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리라. 아집과 이기심에 바탕한 탐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이 모두 행복한 세상인 불국토를 이루어 나가기 위한 서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러나 오랜 습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고, 잘못된 길에 빠져들기도 한다. 마치 저팔계가 먹는 것과 여자에 끌려 사고를 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올바른 불법의 문중에 들었기에 그러한 조그만 벗어남을 극복하고 끝내는 위없는 큰 깨달음을 완성하리라! 불자들은 이러한 큰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자신감 속에 서원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서유기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욕망이라는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 또 무조건 없애야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길들여져야 하고 서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연기의 진리에 눈을 뜨고 부처님 자비광명의 가피를 입게 되면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움직이던 욕망이 자연히 나와 남을 함께 생각하는 서원으로 물꼬를 트는 것이다. 저팔계가 부처를 이루는 과정처럼 수많은 방황은 있을지 몰라도, 부처님의 가피 아래 차츰 물러서지 않는 서원의 힘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탐욕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던 힘은 세상을 이루어가는 참된 능력으로 바뀌게 된다. 저팔계의 법명이 무엇인가? 능력을 깨닫는 것이 아닌가? 저팔계를 통하여 우리가 가진 욕망이 참된 능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성태용 교수
올해는 돼지해, 그것도 황금돼지의 해라 한다. 황금돼지라는 말은 오행사상이나 역학에 비추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을 빌미로 우리 불자들은 진정한 황금돼지의 해를 이루어 보면 어떨까? 탐욕의 상징으로 보이던 저팔계에게서 세상을 바르게 이루어가는 능력의 상징을 보자! 불법의 지혜를 통해 욕망을 서원으로 길들이고 승화시키는 계기를 일으키자!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에는 쉽게도 좌절이 올 수 있지만 서원이 이끄는 삶에는 물러섬이 없다. 욕망의 돼지가 아닌 서원의 돼지? 서원의 돼지라는 말이 좀 어색하니 그것을 황금돼지라고 부른다고 치고, 진정한 황금돼지의 해가 되도록 힘을 내 보자!
성태용 | 건국대 철학과교수
2007-01-06 오전 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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