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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이유?
50년. 한 사람의 생애에서 반세기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긴 시간을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살았다면 그 또한 흔한 일이 아니다. ‘수덕사의 여승’ ‘영산강 처녀’ 등 민요풍 노래로 가요계를 휩쓸었던 불자가수 송춘희 법사가 가요인생 50년을 회고하는 책을 내고 11월 28일 일흔 번째 생일 파티를 겸한 조촐한 축하의 자리도 마련해 지인들과 따뜻한 시간을 가졌다. 화려한 가수생활을 부처님 법 전하는 일로 회향하고 있는 송 법사가 낸 회고록의 제목은 <다시 태어나도 나는 가수가 되리라>(도서출판 답게).
“왜 다시 태어나도 가수가 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 찬불가를 부르며 세계인을 상대로 포교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저녁노을이 아름답다고 했든가? 일생을 노래와 포교 그리고 봉사의 길을 걷고 이제 황혼기를 맞은 송 법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지난 50년의 가수생활이 ‘보살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원로 작곡가 반야월 선생은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노래로써 마음의 양식을 소복소복 담아 준 여장부”라고 송 법사의 보살행을 증언했다.
‘영산강 처녀’를 작곡한 송운선 선생은 “세상풍파의 어려움 속에서도 서글서글한 웃음과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잃지 않고 대중과 함께 해온” 점에 박수를 보냈다. 그밖에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문화로 바뀐 이 시대에도 여전히 현역”(작곡가 김점도) “봉사활동을 가장 많이 하는 가수”(방송인 송해) “늘 기둥같고 큰언니같은 선배”(가수 김상희) “큰 불심으로 직접 보살의 삶을 행하시는 분”(가수 남진)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실천으로 보여 주신 선배”(가수 박일서) 등 주변 사람들의 증언은 끝이 없다.
#50년간 1000곡 부른 ‘한류’ 원조
꿈 많은 소녀 송춘희는 대학을 못간 것이 못내 서글퍼 낙담의 세월을 보내다가 동네에 들어 온 악극단에 들어가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등에는 어린 동생을 업고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오디션을 보러갈 정도로 순진무구했던 소녀는 악극단의 고달픈 생활에서도 늘 즐겁고 발랄하게 지냈다. 매사에 철저하고 야무진 탓에 주변의 사랑을 받았고 연예인으로 뜰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찾아 왔다. 찾아 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소녀는 6년 만에 라디오 드라마 ‘남산골 샌님’(1963년) 주제곡을 히트시키며 가수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해 일본 거류민단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공연을 해 교포와 일본인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원조인 셈이다.
베트남으로의 월남파병 장병 위문공연과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의 해외 공연 길을 누비던 송 법사는 지난 50년 동안 1000여곡을 불렀다. 물론 ‘뜬 노래’도 많다. ‘수덕사의 여승’ ‘영산강 처녀’ 등은 발표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랑을 받고 있으며 노래비도 세워졌다.
#남을 위한 길 자신을 위한 길
캐나다 공연 길에서 만난 광옥스님(봉덕사 주지)과 미국에서 만난 숭산스님(前 화계사 조실)은 송 법사의 인생을 바꿔 놓은 스승들이다. 광옥 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 교리를 접했고 숭산 스님은 ‘백련화(白蓮華)’라는 법명을 지어주며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불교를 배우는 과정에서 송 법사는 나누고 베푸는 삶의 가치를 알게 됐고 교통사고와 위암 수술 등 고난을 극복하며 보살의 길을 더 열심히 걷는 원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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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백련장학회’를 만들어 불우한 환경 속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으며 호국 적성사 등 여러 군법당 건립을 주도해 온 송 법사. MBC 10대 가수상을 비롯 가수로서의 최고상도 여러 번 거머쥐었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살행을 펼쳐 법무부 장관 표창패와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패, KBS 선행상, 교정대상 등에서 화관문화훈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들이 송 법사의 이력을 장엄해 준다.
그러나 송 법사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한다. 그 아쉬움은 남은 나날들도 이웃을 위한 나날로 이어지게 하는 원동력이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