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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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떡다리' 이름의 유래는?
[생활속불교문화]고막대사와 떡다리
서산대사가 포교를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고대가사 <회심곡>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깊은 물에 다리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汲水功德) 하였는가 /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 하였는가~”
이렇듯 산길을 가다 만나는 우물이나, 냇가를 가로질러 놓여진 돌다리의 대부분은 더불어 살고자했던 불자들의 원력이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서 축조연대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다리인 고막석교(보물 1372호)도 그러하다.

전남 함평군 학교면 고막천에 놓여진 이 다리는 고려 원종 14년(1273) 무안 법천사에 주석하던 고막대사(古幕大師)가 세웠다고 한다. 총길이 20m, 너비 3.5m, 높이 2.5m로 5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을 우물마루형식으로 덩벙덤벙 투박하게 놓았지만 무려 730여년을 이어온 장수다리이다.
세찬 물살 속에서도 오늘까지 다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데는 고막석교만의 특별함이 있다.
2001년 보수공사 당시 국내에서 기초가 가장 실팍한 다리로 밝혀졌다. 지반보강을 위해 나무말뚝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을 일정한 두께로 절묘하게 깔아 급류에 쓸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 기둥과 상판축조를 목조가구의 결구법을 응용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단단해 지도록 했다.
이러한 기법은 현대과학이 밝힌 고막석교 축조법이지만, 지역민이 전하는 숨겨진 비법은 ‘고막대사의 도술’이다. 고막대사가 신통력으로 ‘뚝딱’ 지었다고 하여 ‘똑다리’ 혹은 ‘떡다리’로 불리고 있다.
물론 현대과학이나 지역민이 전하는 이야기도 틀린 바는 아니겠지만 ‘중생들을 피안의 세계로 건네고자 하는 고막대사의 원력’을 느껴야 고막석교의 진실은 풀린다.
고막대사가 어느 겨울 냇가를 건너게 되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랫도리를 걷거나 벗어들고 물 속을 건너는 것을 보고 원을 세웠다. 저 언덕으로 하루빨리 건너가기를 기원하며 하룻만에 다리를 세웠던 것이다. 바로 고막석교이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쌀 100섬을 실은 배가 영상강을 따라 고막석교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때에도 상판에서 쌀이 한톨도 빠지지 않는 정교한 다리였다. 아쉽게도 일제 때 보수공사를 한 후 다리가 삐걱거리고 툭하면 보수한다며 사람들의 손을 타야했다.
고막석교에 큰 배가 들어오면 장이 서곤 했다. 함평천지 넓은 들에서 나온 곡물로 떡을 해 나주와 영산포로 팔러가기도 했다.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도 점심 후에는 뜨뜻하게 달궈진 돌다리 위에 누워 낮잠을 청하곤 했다. 저녁이면 물살이 세어 모기가 없는 다리가 사랑방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고막석교의 여유와 운치는 사라지고 아래에 있는 나주-목포간 국도 1호선이 다리역할을 하고 있다. 단지 고막석교 옆 언덕에 세워진 고막석교 유적비만이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함평=이준엽 기자 |
2006-11-29 오후 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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