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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의가 추상적이거나 담론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제망매가’ 한편을 자세히 분석해 가며 왜 불교가 한국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인터넷이나 서양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 왜 불교를 알아야 하며, 더욱이 한국의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인문학은 무엇일까요? 인문학은 별거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과 같이 무슨 직업을 갖고 무엇을 연구하든 간에 이런 궁금증들에 대해서 답하고 밝혀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라고 하는 인간이 주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인문학을 하다보면 불교를 믿든 안믿든 한국 역사의 근원지가 바로 불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학문은 자연과학입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는 학문이 아닙니다. 종교의 세계는 인간의 위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설명해서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서는 안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법문 하는 것, 그것은 원래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불도를 알고 싶으면 간접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출가해서 성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불교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지혜입니다. 이를 공부함으로써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처님을 그리워 하고 부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불심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모든 학문의 뿌리이며, 또 그중에서 불교는 특히 뿌리중의 뿌리입니다.
제가 이 설명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왜 물이 나올까요? 저 멀리 수원지가 있으니까 물이 나오는 것이지, 수도꼭지 자체만 있다면 과연 물이 나오겠습니까? 인문학이라는 것은 틀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아닙니다. 어떤 학문이든 그 뒤에 수도관과 수원지가 있어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이라는 수원지가 있음으로써 다른 학문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력, 총체적 인간의 생각들이 담긴 큰 수원지를 바로 인문학에서 다루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즘은 수도꼭지의 존재만 알고 수원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스스로 인문학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수원지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에 바로 여러분들하고 가장 가까운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인문학의 텃밭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불교를 안 믿는 사람도 바로 여러분들 옆에 항상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든 천주교를 믿든 한국인의 삶은 항상 불교속에서 존재합니다. 그 예로 일상속에서 하는 말을 보면 불교에서 나온 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원지를 따라 계속 추적해보면 전세계가 바로 근원지입니다. 예를들면 ‘아수라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수라는 불교에서 말하는 나쁜 아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아수라란 말이 있었습니다.
인도의 고전인 베다경전에 보면 ‘아수라’ 는 강하고 힘찬 신을 뜻했고, ‘아후라’는 아주 온순하고 온화한 신을 의미한다고 돼 있습니다. 이렇듯 인문학의 뿌리인 불교도 결국은 더 깊이 박혀 있는 뿌리를 좇아올라가면 세계 여러나라의 종교나 역사와도 결부가 돼 있는 것입니다.
베다경전이나 불교 경전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던 ‘아후라’는 신라 향가인 처용가에도 등장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역사나 문학은 불교를 모르고는 사실상 깊이있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지껏 불교도 모르면서 신라향가를 공부한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불교를 함께 공부하면서 신라의 향가 즉 인문학을 공부한다면 남들이 못하는 획기적인 인문학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문학의 뿌리이니까 말입니다.
특히 불교를 공부하면서 ‘제망매가’를 읽다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망매가’는 월명 스님이 자신의 여동생이 죽으니까 재를 올리면서 그 슬픔을 노래했더니 갑자기 광풍이 불면서 지전을 서방정토로 가져갔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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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이야기와 함께 나오는 시이지요. 그런데 이두를 모르면 ‘제망매가’는 읽을 수 없습니다. 이두는 한글이 나오기 이전이니까 말은 우리말인데 글은 중국 글자인 한자를 쓴 것입니다. 주로 스님들이 이두를 만들고 시를 지었습니다. ‘제망매가’를 대표적으로 해석해 놓은 사람이 양주동과 김완진 박사입니다. 이 해석들은 불교를 모르고 한 것이라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는 ‘제망매가’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쓴 월명 스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제망매가 전문
生死路隱(생사로은)
此矣有阿米次 伊遣
(차의유아미차힐이견)
吾隱去內如辭叱都(오은거내여사질도)
毛如云遣去內尼叱古
(모여운견거내니질고)
於內秋察早隱風未(어내추찰조은풍미)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이의피의부량낙시엽여)
一等隱枝良出古(일등은지량출고)
去奴隱處毛冬乎丁(거노은처모동호정)
阿也彌陀刹良逢乎吾
(아야미타찰량봉호오)
道修良待是古如(도수량대시고여)
생사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져히고
나는 갑니다 하는 말도 다 못하고
가버렸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낳아 가지고
가는 것 모르누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양주동 해독)
삶과 죽음의 길은
이(이승)에 있음에 머뭇그리고
나는(죽은 누이를 이름) 간다고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한 어버이)에 나고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으 극락세계에서 만나 볼 나는
불도(佛道)를 닦아서 기다리겠다
(김완진 해독)
‘죽고사는 길은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에서 양 박사는 ‘져히고’라고 했고 김완진씨는 ‘머뭇그리고’라고 다르게 해석했어요. 그런데 두 학자 다 똑같이 번역한 첫마디 죽고사는길 즉 ‘생사로난’ 은 잘못 번역된 것입니다. 이두는 음을 옮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범어인 ‘삼사라(Samsara)’를 이렇게 ‘생사로’로 옮긴 것입니다. ‘삼사라’는 바로 ‘윤회’란 의미입니다. 이는 여러생물체들이 평생 죽고사는 것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죽고사는 생과 사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불교 얘기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마지막 줄에 ‘도닦고 기다린다’는 말도 니르바나(열반)로 읽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삼사라’의 반대말이 열반 아닙니까? 그래야 앞 문장과 맨 끝문장이 내용상 호응이 잘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삼사라’라고 했을까요? 한자로 번역해야 되는데 중국에는 윤회라는 사상이 없습니다.
한자에서 음도 베껴오고 뜻도 비슷한 것을 찾다보니까 ‘삼사라’란 단어를 찾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는 윤회를 전부 ‘생사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생사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삼사라’의 음을 번역한 것입니다.
다시 해석하면 ‘윤회의 길이 여기 있으매 나는 두려움을 잊고 간다’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해석한다면 윤회와 그냥 죽고사는 길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전체의 시 구조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됩니다. ‘삼사라’와 직접 통하는 우리네 삶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고통중에서 가장 큰 것이 생로병사 4고 이지요. 이 고통들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불교적 담론이며 신라향가의 주된 주제입니다. 글자 하나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체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시를 쓰는 사람들이 불교사상의 내용만을 쓴 것이 아니라 불교사상의 논리를 시적 구성으로 삼았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시속에는 사제 즉 고제, 집제, 멸제, 도제가 녹아 있지 않습니까. 이 사제는 의사가 환자를 고칠때 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맞으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진찰을 하죠. “어디가 아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원인을 진단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약을 주지요. 또한 그 환자를 고치기 위해서는 의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도를 닦는 것입니다.
환자를 고치는 과정을 바로 알기 위해서 불도를 닦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 하신 바로 사제입니다.
이런 뜻을 생각하면서 다시 의미를 되새겨보면 ‘윤회의 길이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가노란 말도 못하고 갔는가’ 이 대목에서 고통이 제일 먼저 나왔죠? 바로 고제입니다. 자기 여동생이 죽었느냐 살았느냐 보다는 여동생이 죽기 이전에 윤회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면 그 고통이 어디서 오죠? 가을이 오고 낙엽이 지는 것, 바람에 휘날리는 것 등등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한가지에 낳고도 떨어져서 제각각 흩어지는 것 결국 죽음이 그 원인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지고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없애는 것이 새로운 세계인 ‘미타찰’ 즉 극락세계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극락세계는 그냥 들어가지 못합니다. 도를 닦아야만 갈 수 있습니다. 바로 도제죠. 그래서 이 시는 이 네가지의 ‘고집멸도’ 순으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문학의 뿌리가 불교에 있다는 것을 신라향가인 ‘제망매가’의 해석을 통해 보여드린 만큼 인문학 공부를 위해서 불교도 함께 해야 깊이있는 진정한 인문학 공부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