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경주 기림사 일주문 앞. 불교의 세계관을 펼쳐놓으며 부처님을 만나러 가자고 부추기는 이는 바로 (주)한국수력원자력 월성원자력본부 윤재황(52) 방재환경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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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주변지역 해안관련 민원과 환경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지만 1982년부터 24년간, 휴일이면 경주의 산과 들을 다니며 조상들의 찬란한 문화유적을 만나고 그에 얽힌 유래와 사연을 공부하며 방문객들에게 알려오고 있다. 그런 탓에 회사 안팎에서 ‘걸어다니는 문화재 교과서’로 통하는 그가 오늘도 짬을 내 기림사 안내에 나선 것이다.
목에 미니마이크까지 착용한 채 단체 손님들을 안내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경주 곳곳을 휘적휘적 다니다가 인연이 닿는 대로 다가가 해설을 한다.
다음날인 4일, 윤 부장은 안압지에서 아이들 셋을 데리고 교육차 경주관광을 온 경기도 성남시 분당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대릉과 첨성대, 안압지를 둘러봤다며 다음날 아이들과 수영장에 갔다가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의 역사문화유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판단한 윤 부장 특유의 질문공세와 설명이 이어진다.
“분당엔 수영장이 없습니까?” “있는데요.”
“그럼 불국사는 있습니까?” “없는데요”
“감은사지는요? 사천왕사지는 있습니까? 멀리 경주까지 왔으면 분당에 없는 것을 보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아주머니가 수긍을 하자, 윤 부장은 지도에 예쁜 그림까지 그려주며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향가 14수중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사천왕사지를 소개했다.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월명 스님이 피리를 불면 달조차 쉬어갔다는 곳이라고 부연설명하면서. 우리의 우수한 역사문화를 전하는 동시에 세상을 보는 지혜의 눈도 띄어 주는 윤 부장의 무애행은 늘 이런 식이다.
윤 부장이 문화재 해설을 하는 동안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따라붙는다. 불교설화를 더한 윤 부장의 구수한 입담에 낡고 오래된 붙박이 문화유적들이 되살아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전문 가이드를 대동하고 온 단체여행객이 자신의 가이드는 제쳐두고 따라다니며 설명을 들은 후 어느 여행사에서 온 가이드인지를 묻는 통에 난감했던 적도 있다.
이렇게 윤 부장의 안내는 어딜 가든 인기가 최고다.
동료직원들은 역사문화해설과 어울리지 않는 원자력발전소 직원이 설명하기 때문일거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와함께 유적지 소개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뚝배기같은 풍성한 윤 부장의 외모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은 윤 부장이 물리학과를 전공한 이공학도 출신이라는 것이다. 수식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이론들을 증명을 통해 체계화 구조화시키는 것에 익숙한 윤 부장이 우리의 역사문화도 같은 방법으로 체계화 구조화시킨 탓에 일반 정보들을 무조건 받아들인 여느 문화유적해설사와는 다른 독특한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윤 부장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수없이 읽으며 공부를 했고, 다양한 관련 서적을 살피고 세미나에 참석하며 궁금증을 풀어갔다. 기초교리와 불교설화까지 공부하며 나름의 체계를 세워나갔다. 2004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주관하는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영구회원이 됐다. 지난 4월에는 박물관대학을 나온 이들과 신라옛길답사회를 만들어 월1회 옛 신라의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부인 최팔옥(52)씨도 윤 부장보다 앞서 박물관대학을 수료한 후 문화재해설을 하고 있다는 것.
“저는 집사람때문에 먹고 삽니다”
부인이야기를 묻자 대뜸 이렇게 답하는 윤 부장은 언제나 부인의 지혜를 높이 산다. 윤 부장의 모든 활동이 최팔옥씨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신심 돈독한 최팔옥씨는 1988년 월성원자력본부에 마야부인회를 창립한 장본인이다. 지금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당시 마야부인회는 300여 직원 중 45명의 부인들이 활동하는 대단한 신행단체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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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늬만 불자인 여느 불자와는 활동이 달랐다. 1994년 9월 불의의 사고로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 불교에 귀의하려는 발전소장의 제안을 받아 18명의 정예회원으로 월성원자력발전소 불자회인 반야회를 창립했던 것.
‘삼귀의’ ‘반야심경’도 할 줄 몰랐지만 총무로 법회를 이끌어야했기에 부인의 도움으로 법회 식순과 반야심경을 배우고, 찬불가 테이프도 구해 듣고 또 들었다. 회원들에게도 가르쳤다. 불교기초교리며 천수경 등 불교서적과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참으로 무모했지만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했다.
지금 반야회는 회사의 배려로 법당까지 여법히 갖춘 불자신행회의모습을 갖추고 윤 부장은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재황 부장이 역사문화유산에 특별한 열정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라고 밝혔다. 어린시절부터 유독 국사를 좋아했고, 경주에 온 이후 주말마다 문화유적을 찾아다녔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1994년 정토법당의 경수 법사로부터 경주 동남산 감실부처 부처바위에 대한 해설을 듣고 역사문화유적에 매료됐다. 윤 부장은 지금도 동남산 감실부처와 부처바위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등 경주 동남산 지역을 가장 즐겨 찾는다. 그리고 역사문화유산에 녹아있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삶의 지혜를 전하려고 늘 노력한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삶의 좌우명으로 삼으며 살아온 윤 부장. 요즘 직장내에서 탁월한 민원해결사로서도 유명하다.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누구를 만나든 분별하지 않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대한다면 무슨 일이든 잘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윤재황 부장은 퇴직 후엔 부인과 함께 전업 문화유산해설사로 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것이라며 소박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