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1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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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 사료 기쁜 일… 원문 공개 되길"
<동다기>로 추정되는 <기다(記茶)> 필사본 발견
최근 학계와 차계는 우리나라 고전 다서(茶書)인 <동다기(東茶記)>의 발견 소식으로 들썩이고 있다. 초의 스님의 <동다송>에 인용되어 있는 <동다기>는 그간 원문이 발견되지 않아 원저자와 실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자료를 발굴한 한양대 정민 교수(국어국문학과)는 ‘발굴한 자료가 <동다기>이며, 정약용이 아닌 이덕리의 저술이다’고 주장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동다기>로 확신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며 원문 공개를 촉구하고 있다. 어떤 자료가 발견됐고, 이를 <동다기>로 추정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11월 2일 공개한 <동다기> 추정 자료. 제목이 <기다(記茶)>라고 적혀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 어떤 자료가 발견됐나?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 스님(1786~1866)은 자신이 저술한 <동다송(東茶頌)> 제10송에서 “<동다기>에 ‘어떤 이는 우리나라 차의 효능을 의심해 중국차만 못하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빛깔이나 향, 그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인용해, <동다기>는 <동다송> 보다 앞서는 다서로 지목되어 왔다.
정민 교수는 11월 2일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다산 정약용으로 알려졌던 <동다기>의 저자는 조선시대 무신이자 작가인 이덕리(李德履, 1728~?)”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동 이효천씨 집안에서 발견한 <강심(江心)>이란 제목의 각종 시문 필사본 묶음집에 <기다(記茶)>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으며, 이는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절 막내 제자인 이시헌(1803~1860)이 필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조사 결과 이시헌이 필사한 <기다>는 원저자가 이덕리이며, 1785년 전후 진도 유배 시절에 완성한 저술로, <동다송>에서 인용한 <동다기>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이덕리는 본관이 전의(全義)이며 자는 수지(綏之)를 쓴 무관이다. 1763년(영주 39) 조선통신사 신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창덕궁 수비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이덕리는 시가에도 뛰어나 윤광심(1751~1817)이 펴낸 시문집 <병세집(幷世集)>에도 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 사보세자 복권과 관련한 상소 사건에 연루돼 진도로 유배되어 18년 이상을 보냈다.

▷ 무슨 내용을 담고 있나?
강진도 유배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강심>은 가로 19.6㎝×세로 15.3㎝며 행서와 초서를 절반가량 섞은 세련된 서체로 쓴 필사본으로 모두 55장(110쪽) 분량이다. 이 중 <기다>는 10쪽 분량이며 서설(序說)ㆍ본문(本文)ㆍ다조(茶條)의 세 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설에서는 차가 국가에 보탬이 되는 소중한 자원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차 산지가 호남과 영남 지방에 산재해 있으나 작설차를 약용에 쓸 뿐 마실 줄은 모르며, 1760년 차 파는 중국 배가 표류해 와 비로소 차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후 10년간 그 차를 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차를 따는 시기는 동지에서 곡우 전, 곡우 후에서 망종까지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 차는 잠을 적게 하므로 스님 등에게 필요하며, 대숲 사이에서 나는 차가 좋다고 적고 있다. 특히 ‘황차(黃茶)’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 어떤 차를 황차라 불렀는지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다조에서는 차 사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그 차를 중국에 수출해 경제적 이익을 얻음으로써 이를 국방 강화에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초의학술재단 이사장 용운 스님은 “‘다조’는 앞의 서설, 본문과 달리 <동다기>의 일부가 아닌 별도의 기록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 <동다기> 연구 진행 경과
<동다송>에 대한 초기의 기록으로는 이능화(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와 문일평(1888~1939)의 <호암전집>에 각각 ‘정약용이 귀양 시 <동다기>를 지었다’는 내용이 전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로써 그간 <동다기>의 저자는 정약용으로 알려져 왔다.
1991년 초의학술재단 이사장 용운 스님이 공개한 <동다기> 추정 자료. <다기(茶記)>라는 제목과 전의리라는 저자 이름이 보인다.

<동다기> 연구에 전기를 맞은 것은 1991년 용운 스님이 <동다기>로 추정되는 자료를 발굴해 차 잡지 <다담>에 공개한 뒤부터다. 용운 스님은 당시 법진 스님이 1891년 대흥사에서 필사한 <다경(茶經)합(合)>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전의리(全義李)’라고 기록되어 있는 ‘다기(茶記)’를 발견해 이를 <동다기>라 주장했다. 이 자료는 1992년 1월부터 10월까지 <다담>에 그 내용이 공개됐다. 용운 스님은 “초의 스님이 <동다송>에서 인용한 <동다기>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고, <동다송> 역시 당시 <다송>이라는 이름으로 인용되기도 했던 만큼 <다기>가 곧 <동다기>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용운 스님의 발표 토대로 차 연구가들은 <다기>의 저자가 ‘전의’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일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번에 정민 교수가 발굴한 <기다>의 저자가 전의 이씨인 이덕리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명배씨는 논문 ‘다산 정약용의 다도에 관한 연구’(한국다학회지, 1996년)에서 “근래 ‘다경(합)’에 수록된 ‘다기’를 다산의 <동다기>라고 발표한 잡지가 있으나 객관성이 없다”고 진위 여부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 역시 “아직 원문이 공개되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용운 스님이 발굴한 <다기>와 정민 교수가 발굴한 <기다> 모두 <동다기>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매우 적다”고 말한다. 박 소장은 “책 제목을 <동다기>로 기록한 구절이 없을 뿐 아니라 정민 교수의 경우 <기다>가 저술된 것이 1785년 전후라고 하는데, 이 역시 18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동다기>의 저술연대와는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동국대 김상현 교수(사학과)는 “이덕리의 <기다>는 <동다기>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떠나, 사료가 부족한 우리 차계에 깊이 있는 다서 한 권이 추가됐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뜻 깊다”며 “원문이 공개되어 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6-11-13 오후 2: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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