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은 현대아산병원 영안실 35호실이며, 발인은 11월 5일 오전 5시. 영결식은 경기도 파주 신흥인쇄 본사에서 열린다.
1935년 출생한 박 고문은 범국민직지회장 등을 역임하며 ‘직지’ 사랑을 펼쳐왔다. 또 신흥인쇄 대표이사, 대한인쇄문화협회 회장, 불광사 신도회장 등을 맡으며 불교계 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02)3010-2295
다음은 본지 491호(2004년 9월 15일자) ''도반의 향기''에 실린 고인 관련 기사.
<직지>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직지>찾기 운동을 활발히 주도하고 범국민직지회 박충일(신흥인쇄소·71) 회장. 40년간 인쇄인으로 살아온 그는 현재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 회장으로 우리나라 인쇄산업계를 이끌고 있는 수장(首長)이다. “1988년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개화기 연활자 도입이 언론에 미친 영향 연구>를 석사논문으로 제출했지요.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납 활자로 인쇄한 독립신문이 주제였는데, 훗날 <직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제가 일본을 인쇄 종주국인 양 논문을 썼다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직지>를 찾아 우리나라가 인쇄 종주국임을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원(願)을 품은 박 회장은 ‘청주 직지찾기운동본부’,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 등과 더불어 프랑스에 있는 ‘<직지> 반환운동’, 국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직지> 찾기 운동’을 벌였다. 각종 세계 인쇄기자재 전시회에서 <직지> 반환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고, 유네스코에는 <직지> 반환 요청 및 세계기록유산 등재 등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노력 덕분이었을까. 2001년에는 <직지>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박 회장이 <직지>에 강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사실 말고도 한 가지 더 있다. 선(禪)의 요체를 담은 <직지>는 불서(佛書)라는 것. 신심 돈독한 불자인 그에게 <직지>는 인쇄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박 회장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의 자리는 늘 ‘불교’와 ‘인쇄’가 만나는 그곳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동국대 졸업 후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 동국대학교 내 인쇄소였으며, 그곳에서 처음 발간한 책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의 <불교학보 1집>(1963)이었다. 65년부터는 독립해서 차린 신흥인쇄소에서 <불교학보>를 인쇄, 40집까지 도맡아 제작했다. 동국대의 <고려대장경 영인본>, <석보상절 영인본> 등도 모두 박 회장의 손을 거쳤다. 60년대 초반 광덕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 말씀을 흘려보내기 아까워 스님께 책으로 만들어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광덕 스님은 “한 권의 책은 법사와 같다”며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때 탄생한 것이 <불광>지다. 이후로 박 회장은 불광법회 회장을 맡아 8년간 신도회 조직화에 힘쓰는 등, 불법과의 인연을 넓혀갔다. 아내 양문정(71) 씨 또한 20여 년간 ‘명등보살’로 강남구의 신도조직을 이끌며 박 회장과 보조를 맞췄다. “광덕 스님께서 법회 때마다 대중들과 함께 다짐한 ‘전법오서(傳法五誓)’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을 전하는 것이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서원인데, <불광>지야 말로 저 같은 인쇄인이 할 수 있는 최적의 ‘전법’이었던 셈입니다.” 박 회장의 ‘전법’은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1972년 언론 탄압정책으로부터 당시 유일한 불교계 신문이었던 <대한불교신문>을 지켜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정부는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은 신문사는 폐간하도록 해, 인쇄시설이 없던 <대한불교신문>이 폐간 위기에 처한 것. 이때 박 회장은 자신의 인쇄소의 간판을 ‘대한불교신문사 공무국’으로 바꿔달았고, <대한불교신문>은 폐간 위기를 넘겼다. 이로 인한 박 회장의 피해는 막심했다. “기독교 신자인 직원들은 새로 단 간판이 보기 싫다고 줄줄이 그만뒀고, 기독교 계통 거래처들도 등을 돌렸습니다. 정부관련 인쇄물 입찰 자격도 상실했지요.” 그런 어려움을 박 회장은 불심으로 이겨냈고, 신흥인쇄소는 다시 번창할 수 있었다. 지난 9월 4일. 서울 인쇄정보센터에서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 주최로 ‘직지 탄생일 선포식’이 열렸다. 현재 프랑스에 남아 있는 <직지>의 간기(刊記)에는 ‘宣光七年丁巳七月 日’로, 날짜가 공란으로 돼 있어 제작일을 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 박 회장을 포함한 인쇄인들이 학계의 자문을 받아 당시 7월 백중에 해당하는 8월 19일을 <직지> 탄생일로 선포한 것이다. “우리 인쇄문화의 발전을 주도한 것은 불교였습니다. 그 사실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 등이 말해줍니다.” 그러나 선조가 빛낸 인쇄 문화와 대비할 때, 오늘날 우리의 인쇄기술의 위상은 초라해 부끄럽다고 박 회장은 고백한다. 윤전기 생산 능력이 없어서 45억이나 하는 윤전기를 수입해야 하고, 인쇄 관련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하는 것이 현실이다. “<직지>는 우리의 뿌리에 관한 문제요, 인쇄기술발전은 우리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두 과제를 성취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직지>의 참된 계승자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박익순 기자 ·사진=고영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