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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쌍탑의 효시 사천왕사 서탑은?
신라 쌍탑의 시초인 사천왕사 동ㆍ서탑은 목탑이었으나 현재는 기단부만 남아있다. 서탑지는 흙과 적당한 크기의 돌을 교대로 쌓아 올려 만든 기단을 파낸 후 내부에 적심을 하고 그 위에 방형 초석과 심초석을 안치했다.
서탑지 발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종래 한국 불교건축계에서는 전혀 존재가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건축양식이라는 것과 학계 일부에서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고도 주장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과 관련해서도 뜻하지 않은 비밀이 풀린 점이다.
서탑지 기단은 돌과 흙, 돌조각 등을 이용해 축조했으며 기단 테두리는 매우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마치 나무상자를 짜듯이 연결했으며 기단 위로는 전돌을 쌓아올렸으며 그 안쪽에는 흙과 자갈을 섞어 바닥을 다졌다. 따라서 사천왕사지 서탑지는 ‘석조 + 전돌’의 혼합양식으로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전돌로 쌓아올린 벽 사이사이에는 벽마다 4구씩 녹유사천왕상을 안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되면 사천왕사 서탑만 해도 모두 16구에 이르는 사천왕상을 조각한 셈이 된다.
기단규모를 복원하면 한 변 최대너비는 9.9m며 탑구를 포함할 경우에는 12.4m이고 기단과 계단너비는 각각 1.4m와 2.45m다.
# 발굴조사성과는?
‘사천왕사지 발굴조사’는 ‘방치된 신라 옛 사찰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4월 25일 고유제를 시작으로 2009년까지 사역의 범위와 가람배치, 각 건물지의 성격규명을 목적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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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은 사역 서편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금당 중심에서 회랑으로 이어지는 서익랑의 존재를 확인했다. 익랑은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1300여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서익랑지에서 남북으로 뻗은 회랑지도 확인됐으며 회랑 서편에서는 대형 치미편도 출토됐다.
특히 이번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서탑지의 기단부 및 하부구조를 명확히 밝혔다는 것이다. 즉 그동안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녹유사천왕상전의 일부가 기단석에서 출토됐기 때문에 그 배치구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금당지 남편에 폐사(閉寺) 이후에 만들어진 이장된 조선시대 회곽묘를 조사해 상태가 양호한 이중관도 확인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은 “현재 진행 중인 서탑지 기단부 발굴조사는 1978년 황룡사 9층목탑 발굴조사 이후 28년만에 통일신라시대 목탑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조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후 초미의 관심사는 이 심초석 아래 진단구(鎭壇具, 일종의 사리공양구)가 있을 지 여부에 쏠리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중 탐사 결과 진단구일 지 모르는 금속성 흔적이 심초석 지하 1m 지점에서 확인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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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목되는 발굴유물
사천왕사는 신라시대 뛰어난 조각가 양지 스님이 작품활동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녹유사천왕상전은 점토로 만든 틀을 이용해 찍어 낸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확인된 유물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전시된 녹유사천왕상은 악귀를 깔고 앉은 사천왕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갑옷 및 복식 등은 불교미술학계의 중요한 연구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녹유사천왕상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한 날개관을 쓰고 있으며 부릅뜬 눈, 축 늘어진 귀, 익살스런 표정 등이 더욱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또 섬세하게 표현된 갑옷과 아름다운 화문장, 테두리 장식 등은 당시의 불교조각 수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밖에도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당초문전, 수막새, 암막새, 귀면와, 녹유능형전 등 8종 50여점 등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