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02-2077-9000)이 ‘김정희 명품 콜렉션’을 표방한 ‘추사 김정희 학예(學藝) 일치의 경지’는 10월 3일에 개막한 이래 관람객들의 인기를 얻으며 11월 19일까지 계속 된다.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가 10m에 이르는 발문까지 전체가 완전 공개된다. 90여 점의 추사 유물을 선보일 전시 기간 중인 11월 1일에는 이완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가 ‘추사 김정희의 서풍(書風)’을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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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02-760-0442)은 10월 15일부터 단 2주간 ‘추사 150주기 기념특별전’을 열고 있다. 10월 19일부터 내년 1월 28일까지 ‘조선말기 회화전’을 여는 삼성미술관 리움(02-2014-6901)은 추사실을 별도로 만들어, 보물 제547호 <반야심경> 등을 공개하고 있다. 11월 25일에는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해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12월 16일에는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를 주제로 이태호 명지대 교수가 특강한다.
과천시민회관(02-504-7300)이 9월말부터 전시하고 있는 ‘추사 글씨 귀향전’은 추사 연구의 선구자인 일본 학자 후지즈카 치카시로부터 기증받은 추사 관련 자료 2700여점 가운데 추려낸 110점을 11월 8일까지 전시한다.
이렇듯 추사 김정희를 조명하는 다양한 전시회가 마련되고 있는 요즘 추사 김정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불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추사가 남긴 유품과 글들에서 유추해 불자들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로 꾸며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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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음의 안정을 구하기 위해 수시로 <반야심경>을 써왔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때가 묻은 몸으로 <반야심경>을 쓴 것은 불 속에서 연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이요, 더러운 곳에 살면서도 늘 청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호법금강에게 비웃음 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썼지요.
그렇게 쓴 <반야심경>은 절친한 친우이자 학문적 동반자였던 초의선사가 조용히 독송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인편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의선사에게 써 보낸 경전 가운데는 <열반경>도 있었지요.
초의선사가 서른이 되던 해 처음 알게 돼 평생을 교류했어요. 유배지에서도 수시로 서간을 띄워 차도 보내달라 하고, 경전도 요청하고 그랬답니다. 출가하기 전 과천에 머무를 때 송의 고승 대혜선사의 공안 하나를 남김없이 다 타파했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 기쁨을 전하며 초의선사에게 당나라 도세 스님이 편찬한 <법원주림>과 송나라 영명연수스님이 편찬한 <종경신편어록>을 고증하시는 것은 어떠냐고 추천하기도 했지요.
초의선사에게 보냈던 17편의 편지들은 <나가묵연>이라는 이름의 편지첩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11편은 <완당전집> 권5 서독에 실린 편지 37편 중에 포함돼 있는 것이고 6편이 <나가묵연>에만 남아 있는 편지예요.
제 속에 녹아든 불교를 가장 깊게 표현한 작품은 <반야심경> 사경도, 사찰 현판도 아닌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입니다. ‘불이선란도’는 거칠게 흩어져서 메마른 난초를 그렸어요. 거친 난초잎사귀 한 편에는 꽃도 한 송이 달렸지요. 제가 지향하고 있는 이상적인 난초 그림의 경지를 실현한 작품입니다. 제가 가진 학문과 예술이, 서화와 함께 일치해 있기에 화품과 인품이 맞닿은 소중한 도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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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란도’는 20여년 만에 그린 그림입니다.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냈다는 자부심도 느낄 정도죠. 문을 닫고 깊이 깊이 찾아든 그 경지가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었을 겁니다. 독자보살께서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저는 마땅히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절하겠네요.
열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읜 제가 어머니 품으로 삼았던 곳이 저희 집안의 원찰 예산 화암사입니다. 화암사 현판도 쓰고, 대웅전 뒤편 바위에 글도 새겼지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염주도 지금은 보물이 되어 있더군요.
초의선사와 함께 제 벗이었던 이가 백파 긍선대사입니다. 백파대사는 제 학문적 동반자이기도 해요. 백파가 열반한 후 제가 비문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를 썼지요. 이 비문의 글씨는 제 만년의 걸작품이라고 세간에선 말하고들 합니다.
저는 가끔 백파대사에게 서간을 보내 불교에 유교와 세상속설을 끌어들여 합리화하는 전통적인 사고를 탈피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 땅에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불경과 유가경전을 병행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유불회통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불교 안에서도 선은 선 자체고, 화엄은 화엄이며, 반야는 반야로 존재해야지 그것을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이죠.
저는 유교는 유교만의 장처(長處)를 지니며, 불교는 불교만의 장처를 지니는 엄연한 독립체라고 생각합니다. 섞이기 보다는 오히려 주변을 없애고 군더더기를 버리고 다시 나눌 수 없을 때까지 나눠 결국 물 자체의 제법실상이 드러나기를 희구해야 합니다.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참선을 한다하여 교학공부를 게을리 한다면 득도의 난관을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오가해> <능엄경> <유마경> <관음경> <화엄경> <법화경> 등을 읽으며 공부했어요. 경전을 사경하는 것은 훌륭한 수행방법입니다.
<전등록> <법원주림> <종경전부> 등도 읽으며 선 수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에서 9년, 북청에서 2년, 그 두 번의 유배생활 끝에 과천에 돌아온 저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예순 여덟 나이에 저는 봉은사를 찾아가 구족계를 받고 승복을 걸쳤습니다.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외손자이자 제 수제자인 금계 윤종진에게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구하고 싶다는 서간을 띄우기도 했지요.
정쟁 등으로 아버지를 잃고 저는 유배생활을 하는등 거대한 파도와 마주해 싸워야만 했던 평생동안 불교를 접한 것은 저에게 진정한 안식을 준 일입니다. 속진에 물들지 않고 남은 여생 부처님 품안에서 보냈던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지요. 괴로움은 본래 지은 업에 반연해서 나왔다 사라지곤 하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괴로움을 돌려 즐거움으로 삼는 것은 제가 약간의 불교 공부와 수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썼던 선시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수락산사(水落山寺)
아견일여월(我見日與月) 나는 저 해와 달을 쳐다볼 때
광경각상신(光景覺常新) 광경이 늘 새로움을 깨닫게 되네.
만상각자재(萬象各自在) 만 가지 상이 각각 다 그대로라.
찰찰급진진(刹刹及塵塵) 끝없는 나라와 나라
수지현곽처(誰知玄廓處) 누가 알리 어둑어둑 텅 빈 곳에
차설동차인(此雪同此人) 이 눈이 이 사람과 함께 한 것을
허뢰착위우(虛籟錯爲雨) 빈 소리는 빗소리로 착각하고
환화불성춘(幻華不成春) 환화는 끝내 봄을 못 이루도다.
수중백억보(手中百億寶) 손 가운데 백억의 보물은
증비걸지린(曾非乞之隣) 이웃에서 빌리는 게 아니라네.
단파거사(檀波居士ㆍ김정희)가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