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첫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마치 하얀 옷을 입은 듯이 본래의 색깔을 감추었다. 작년에는 이렇게 한꺼번에 눈이 많이 온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보는 새하얀 세상도 새롭고,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기분도 좋다. 하지만 눈이 많이 온 관계로 예정되었던 감 따는 울력이 연기되었다. 내린 눈이 녹고 쌓이고, 땅이 얼고 녹기를 며칠. 눈발은 멈추었고 쌓였던 눈도 어느 정도 녹아 산들이 다시 흙빛을 찾을 무렵 드디어 미루었던 감 울력을 한단다.
두툼하게 옷을 껴입고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말로만 들었던 감이 많이 열려 있다는 대원사로 강원 스님 40여명이 출발했다. 연지문을 지나 계곡으로 향하니 아직 흰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계곡 나무 위에 홍시가 빨갛게 많이도 달려 있다.
“와! 감이다.”
하지만 막상 나무 밑에 다다라서 나무 위를 쳐다보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떻게 따야 하나, 나무 위에 오르기도 애매하고, 대나무로 가지를 때려 보자니 너무 높이 달려 있고, 잘 익은 홍시라서 땅에 떨어지면 온전할 리도 없을 성싶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때, 행동파(?) 스님들이 장대를 들고 나무를 탔다. 장대로 힘겹게 허공을 휘저어 가지를 치니, 떨어진 감들은 반 이상은 터져 버린다. 다행히 눈 위에 떨어진 감들만이 눈 속에 몸을 살며시 감추며 겨우 부상을 면했다.
얼마 후, 나무 잘 타는 스님이 한 분 더 우리 편에 합세하여 엄두를 못 내던 나무에 올라갔다. 순식간에 나란히 서 있는 감나무의 한쪽에 시원하게 감비가 내리니 밑에 있던 스님들은 감을 줍기 바쁘다.
다른 나무에 비해 유달리 컸던 감나무여서 감도 또한 많이 열렸었는데, 한쪽만 따고 나니 욕심이 생기게 마련인가! 옆의 나무로 옮겨가서 다시 감을 따기 시작한다.
감을 줍느라 정신이 없을 무렵 갑자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무의식적으로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나무 위엔 아무도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스님들 표정이 바싹 긴장되어 있다.
“스님, 괜찮아요!”
“스님, 움직이지 마세요. 그대로 그냥 있으세요.”
스님들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조금 전까지 나무 위에 있던 그 스님이 나무 밑에 그대로 엎어진 상태로 미동도 않는다. 계곡 위에서 감을 따고 있던 스님 한 분이 뛰어와서 부목을 가져와라, 목도리를 벗어라, 지시하며 환자를 운반할 준비를 하는 동안 대부분의 다른 스님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드디어 운반 준비가 다 되고 나무에 오를 때 썼던 사다리에, 아래 절에서 가져온 스티로폼을 까니 운반할 들것이 마련되었다. 스님을 운반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되었다. 이 몸뚱이의 나약함도 느끼고, 한 나무만 따고 내려오게 할 걸 하는 생각도 들고, 그저 모두들 할 말을 잊은 채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그렇게 20분쯤 지나 드디어 구급차가 도착하고 스님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조심하세요.”
“감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위험하대요.”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큰일 난대요.”
말들은 많이 했지만, 그 말리는 말들이 절실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게 알고 있을 뿐 체험해 보지 않아서 어쩌면 형식적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이왕 올라갔으니 모두 흔들어 버리고 내려오소!’ 하는 욕심이 더 했는지도 모른다. 사고를 당한 스님도 올라가기 전에 “괜찮아요! 인명은 재천이에요. 한두 번 나무 타 보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하고 나니, 생각 없이 던져졌던 말들이 순식간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 순간의 사고로 인하여 의미 없던 말들이 비장한 의미로 모두의 가슴에 저며 왔다. 부디 부상이 심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돌아오는 버스 안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새겨 보게 됐다. 아무리 간단한 지식도, 듣고 들어 귀에 박혀 있던 지식도, 온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것은 진정 아는 게 아님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그 누가 감나무가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는가?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 누구도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머리로만 ‘위험하대요’ 되새겼을 뿐일 수도…….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중생의 세계. 불교가 수행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로서 수행하는 승가조직을 여태껏 유지해 오고 있는 당위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직도 무명 속에 잠겨 있는 나는 얼마나 수행해야 공적영지空寂靈智의 경지가 드러날지. 오늘따라 부처님이 더욱 우러러 보이고, 존경스러움이 환한 모습으로 가슴을 채워왔다.
큰절에 돌아와 온통 사고 현장의 분위기가 큰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무렵,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오니 사교반 스님 한 분이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며 찰중 스님을 부른다. 순간 집중된 스님들의 시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아무 데도 이상이 없답니다. 병원에서는 퇴원해도 된다고 하는데, 하루 이틀 더 있어 보기로 했답니다.”
“정말입니까?”
몇 번을 되묻던 스님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데. 천만다행이야.”
“그 높은 나무에서 떨어졌는데.”
한 마디씩 하는 스님들의 말 속에 안도의 한숨이 배어 나온다.
“스님들! 다음부터는 위험한 곳엔 가지 맙시다.”
“스님! 어디가 위험한 곳이고, 어디가 안전한 곳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