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모(드라마 PD, 69·가명)
촬영협조 요청에 사찰측 냉담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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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때부터 독실한 불자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시절부터 충북 괴산인 고향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사찰을 드나들었으며, 20살때 서울로 올라와서는 조계사에 열심히 다니며 불교에 대한 애정을 키워왔습니다.”
이런 장씨가 개신교로 개종 결심을 한 것은 1982년경이다. TV문학관 촬영을 위해 전라도의 모 사찰을 찾았는데 촬영 협조가 전혀 안돼 불교에 대한 큰 실망감을 갖게 됐다.
“불교를 시청자들에게 널리 알리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촬영 협조를 부탁했더니 우리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굳이 애써 알릴 필요가 없다며 사찰측에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더군다나 사찰 전각들이 훼손된다며 일체 촬영을 허락 하지 않았어요.”
예정된 제작 마감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차례 부탁해 절 마당에서의 부분 촬영을 간신히 허락받았지만 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정작 장 PD가 필요한 것은 1백여 스님들의 수행 장면이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어 마을 주민들을 엑스트라로 동원해 가까스로 촬영을 마쳤어요. 이때 저는 스님들과 불교에 대한 원망감에,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곧바로 개종 하게 됐습니다. 이후 25년 동안 신앙 생활을 하며 현재는 장로교 집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불교에 대한 애정은 많이 남아 있어요. 개신교쪽에서는 오히려 제작비까지 지원해 주며 선교 드라마를 찍어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 환경이 많이 좋아진걸로 압니다만 불교도 영상 포교에 대한 활발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상선(前 초등학교 교장·72 )
무료 노인시설, 상조회 등 혜택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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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들어 개종하게 된 박상선씨(72·前 초등학교 교장). 서울 구로동 모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박씨는 개종한 가장 큰 이유를 외로움이라고 거론했다.
“가톨릭쪽에는 무료 노인시설을 갖춰 놓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는 곳이 많습니다. 무료노인시설을 이용하는 노인 대부분이 오갈 데 없는 상황이라 시설에서 여러 방법으로 종교를 강요할 경우 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박씨는 하루종일 복지관에서 오전에는 서예를, 오후에는 또래의 노인들과 탁구를 치며 소일한다.
가톨릭은 특히 불교와 정서적인 분위기가 비슷한 점이 많아 개종하는데 큰 망설임이 없었다는 박씨는 “수녀님들이 때로는 친구같이 때로는 딸처럼 친근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외로움을 떨쳐버리기에 안성맞춤”이라고 말했다.
박씨가 이 성당 복지관을 이용하는 이유중 또하나는 박씨처럼 혼자사는 노인들이 갑자기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성당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신속하게 치료까지 받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임종하게 되면 복지관에서 성당 상조회팀까지 연결해줘 장례 서비스도 해주기 때문에 성당 복지관만 나오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돼 굳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도 된다.
“성당 복지관들은 복지사 뿐만 아니라 신부·수녀님들이 따뜻하게 대해주고 종교적인 교리도 틈틈히 들려줘 마음이 편안합니다. 세심한 관심과 편안한 시설이 많은 노인들을 성당으로 불러들이는 것 같습니다.”
김성권(탈북자, 30·가명)
생일 등 챙겨주며 형제처럼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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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해 탈북에 성공, 한국에 와서는 성남의 한 교회에 나가고 있다.
“문화나 환경이 전혀 다른 남한서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습네다. 저도 한동안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 못해 직장도 걷어 치우고 술로만 지낸 적이 있었습네다. 그때 동료 탈북자 소개로 알게된 교회에 나가면서 차음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네다.”
교회 목사는 집요하리만치 김씨에게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혼자사는 김씨에게 김치 등 밑반찬을 집까지 배달해주는가 하면 명절때나 김씨의 생일날이면 교회 식구들과 함께 식사하며 친 형제처럼 대해주었다.
또한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한 김씨에게 같은 교회 신자가 사장으로 있는 무역 회사에 취직까지 시켜 주었다.
“탈북자들은 항상 북에 두고온 가족을 마음속에 그리며 삽네다. 그러다보니 식당에서 가족들까리 오순도순 식사하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날때가 많지요. 내가 다니는 교회 관계자들은 이런 나에게 가족 이상이나 다름없지요. 그래서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에게 나도 함께 의지하고 살게 됐습네다.”
이제 김씨도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히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반바이찬 구릉(네팔인·34))
일하다 부상…수술비 마련, 자주 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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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돈을 벌면 네팔에서 병을 앓고 계신 아버지에게 거의 다 부쳐드렸기 때문에 입원비조차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장님께서는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말만 계속하며 치료조차 시켜주질 않았어요.”
이런 딱한 사정은 필리핀 출신 회사 동료 다니엘씨를 통해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다음날 구릉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은 목사는 모금활동을 통해 구릉씨의 수술비 전액을 마련해 주었고, 2개월여의 투병기간 동안 교회신자들과 함께 자주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또한 구릉씨가 퇴원한 후에는 외국인 노동자 인권 보호 단체를 통해 회사 사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벌여 위자료를 받아내 주기도 했다.
“목사님은 수렁에 빠졌던 제 인생의 구원자입니다. 정말 살길이 막막했는데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셔서 이제는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이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 안산지역 교회에는 자신처럼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법률상담과 한글교육을 해주는 곳이 많아 좋다는 구릉씨는 내년에 네팔로 돌아가서도 계속 교회에 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