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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관 할아버지' 이겸로翁 타계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의 창업자이자 고서적 수집가 이겸로翁이 15일 오후 2시 45분 종로구 누상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97세.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7일 오전 8시다. (02)3410-6914
이겸로옹은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16세때 서울 견지동의 작은 서점 선문옥의 점원으로 들어간 뒤 1934년 25세 나이로 고서점 금항당의 사장이 됐다. 이후 금항당의 이름을 통문관으로 바꾸며 약 70여년 동안 고서점을 운영한 고서점계 산 증인이다.
특히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 독립신문 삼국유사 등 많은 보물급 고서가 그의 손에 의해 빛을 보기도 했다.


다음은 본지 제110호(1997.1.15)에 실린 기사 전문.

[산문밖의 선]‘心外無佛’ 내 인생의 주장자 (통문관 대표 이겸로 翁)

“옛책 통해 선조들 정신 배우고 탐욕도 녹여요”
6·25땐 고서 80권 짊어지고 피난 ‘평생 책사랑’


이겸로옹의 생전 모습


옛 것은 오늘을 낳는다! 그윽한 역사의 향기는 어떻게 전해지는 것일까.
소중한 전적(典籍)들이 외적들에 빼앗기다시피 마구 유출되어 나갔고, 또는 무지한 백성들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동안 민족 문화유산이 맥없이 허물어지고 있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자취를 간직하려는 보이지 않는 수집가들에 의해 흔적이나마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한층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화랑 골동품상이 빼곡한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고서적들이 지나가는 통로이자 창고역할을 해 온 고서점 ‘통문관(通文館)’. 70여년의 세월동안 통문관을 운영해 온 이겸로옹(89)은 옛 것을 오늘에 낳은 ‘통문관 할아버지’로 통한다.

“8·15 광복, 6·25를 겪으면서 쏟아져 나온 국보급 고서, 자료들이 외적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수만은 없었지. 고서발굴에 뛰어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셈이야. 배운 것이 미천해 역사의 중요성을 훤히 꿸 수는 없었지만. 허허.” 올해로 춘추 여든아홉. 미수(米壽)를 넘긴 이옹은 그 허허로운 웃음 속에 이미 세상을 꿰뚫고 있었다.

“고서를 취급하면서 옛 선사의 한마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심외무불(心外無佛) 촉목개불(觸目皆佛)’이라는거야. 내 마음 안에 바로 부처가 있고,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마음먹기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내 인생을 버텨낼 수 있는 주장자였지. 그래서 말인데 남들이 나를 두고 ‘역사의 파수꾼’이니 ‘국학발전의 전령’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은 단지 그 가르침 하나만으로 살아온 나를 부끄럽게 할 뿐이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그가 짧게 내뱉은 웃음 속에 배어나온 선객(禪客)의 힘을 가식없는 하심의 한마디 한마디 속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옹은 16살에 책방 점원을 시작 9년만인 1934년 통문관의 전신인 금향당을 차린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년을 오로지 빛바랜 고서와 함께 살아왔다. 반세기 넘는 세월동안 보배로운 우리 옛 책을 찾아내는 수집가요, 2만권 넘게 간수하고 있는 장서가로 현역 생활을 해 왔다. 어디 그뿐인가. 어려운 옛 전적을 현대인들이 알 수 있게 풀어내는 서지(書誌)학자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고려때의 <직지심경>을 비롯한 조선초기의 계미자(癸未字)(1403) 경자(庚子)자(1420) 갑인(甲寅)자(1434) 등 우리 옛 활자(체) 여러 가지를 판별 감식하는 고활자 연구가이다. 또 아무리 낡고 헝클어진 옛책이라도 말끔히 제 모습으로 되살려 놓는 제책 기술자이기도 하다.

이옹은 <통문관 책방비화> <문방사우> 등의 저서도 펴냈다. 반년전 둘째아들에게 대물림을 하기 전까지는 통문관 주인이기도 했다.

이옹은 그렇게 수많은 인생전적을 쌓아오면서 ‘나 없는 곳에서 나를 찾는 작업’으로 신명의 경계를 드나들었다. 고서를 대하면서 무념무상을 몸에 익혔고, 인생의 ‘걸림’을 삭히는 체내림을 배웠던 것이다.

“6·25 당시 피난길에 옷보따리 대신 <조선군서대계(朝鮮群書大系)> 전 80권의 책만 짊어지고 떠났었지.” 그토록 ‘책사랑’에 빠졌던 이옹은 스스로를 ‘고서더미에 묻혀 책을 갉아 먹는 좀벌레’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그는 평생 폐지더미에서 귀중한 우리 옛 책들을 발굴·복구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인이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던 <월인석보>와 상해 임시정부가 두 책으로 묶은 <독립신문>을 발굴하고 연세대에 기증한 일, 이희승박사의 소개로 <삼국유사>를 찾아 서울대에 소장케 한 일 등 이옹이 고서발굴과 보전·전파에 헌신적으로 기울인 노력은 이루 말로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옛 사람의 체취와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전적을 대하다보면 옛사람의 정신을 배우고 마음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지. 그 순간만큼은 탐욕이 봄눈 녹듯 말끔히 사라지거든. 사소한 욕심이란 가당찮은 일이지. 고서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만큼은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일게 하지. 그 즐거움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어.”
다소 짐작하기 힘든 경지를 설명하는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와 전적과의 인연은 굴곡많았던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고서가 나올건 거의 다 나왔는지 요즘은 통 고서가 안나와. 읽는 사람도 드물고”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이옹은 “도서관들이 책을 더 많이 사들여 이용자들에게 보다 충실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도서관을 통한 독서풍토를 강조했다.

아직도 하루에 한번은 통문관에 나와야 마음이 편하다는 이옹은 건강비결로 소식(小食)과 편안한 마음가짐을 꼽으며 “일에 집중하면 정신통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집에 소장하고 있는 도서 1만여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할 계획인 그의 고서에 대한 애정어린 손놀림이 평정심으로 전위되고, 한철 안거를 마치고 하산하는 수행승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도필선 기자

2006-10-16 오후 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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