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 혁련정(赫連挺)이 1074년 가을에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완성한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의 강탄영험분(降誕靈驗分)의 첫머리이다. 흔히 보이는 영웅, 성인의 전기와 다를 바 없는 영험스러운 일들이 균여의 탄생을 즈음해서도 일어났음을 서술하고 있는 어찌 보면 평범한 서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이어지는 구절로 어려서부터 재지가 뛰어났느니 하는 문장을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전혀 반대의 것이다.
처음 탄생했을 때 용모가 비길 데 없이 추하여서 부모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길거리에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마리의 까마귀가 버려진 아이의 몸을 날개로 덮어 보호하므로 아버지는 후회하고 어머니는 한스럽게 여겨서 다시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당당히 내어놓고 자랑하며 기른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쉽사리 볼 수 없도록 상자 속에 넣어두고 길렀다고 하니 그 용모의 괴이함이 지나쳤던 것으로 보인다.
까마귀가 날개로 보호하여 아이를 다시 데려다 길렀다거나, 한 쌍의 봉황이 품에 들어오는 태몽 역시 스님이 어렸을 때 용모로 인해 고생했던 사실을 후인들이 오히려 미화시킨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더욱이 21순(旬)만에 태어났다 했으니 흔히 말하는 칠삭둥이로 신체 역시 강건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스님의 용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기에 전한다. 국사가 된 후에 향찰로 보현십종원왕가를 지었는데, 최행귀가 이를 한시로 번역하였다. 그것을 중국 사람이 다투어 베껴서 전하였고 소문이 황제에게까지 들어갔다.
황제의 신하들이 이 노래를 지은 이는 부처가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주청하여 사신을 보내어 스님에게 공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사신을 맞은 고려 조정에서는 사신이 스님의 용모를 보고 깔볼 것을 염려하여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스님 또한 그 사정을 알아채고는 통역관을 보내어 직접 뵙기를 청하는 사신을 만나지 않고 몸을 감추어버렸다. 이 역시 스님의 용모가 평범하지 않음을 넘어서 괴이하기까지 했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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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뜬금없이 스님 이야기를 하면서 전연 상관없는 외모 이야기만 풀어놓는지 의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외모로 인하여 바깥출입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천형도 그런 천형이 없었을 것이다.
갓 태어났을 때는 부모마저 외면하여 버려졌으며, 승과에서 스님의 뜻으로 정통을 삼고 왕의 존경을 받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 용모의 괴이함 때문에 중국에서 이역만리 찾아온 사신마저 만나지 않았을 정도이니 용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가 후에 의순 화상을 쫓아 영통사(靈通寺)로 옮긴 후 26년간을 주석했는데, 왕의 초빙을 받아 귀법사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줄곧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 연구와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때 스님은 화엄사상의 여러 갈래들을 모아 융합시킨 저술들을 지어 세간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스님이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던 화엄경의 사상은 보살이 어떻게 믿음의 대지에서 서원을 세우는지, 그리고 그 서원의 힘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하는 내용들로 부처님의 세계를 장엄하는 모습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보현보살의 원과 행은 그 모든 것들 중의 으뜸이라 하여 원왕(願王)으로까지 불리는 것이다. 일체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늘 따라 배우고(常隨佛學願),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수순하여 이익되게 하며(恒順衆生願), 일체 공적을 모두 중생들에게 회향하고자 하는(普皆廻向願) 보살의 무량한 서원을 접했을 때 균여에게 그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 펼쳐졌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하나 글로 옮긴 것이 바로 <법계도원통기> <교분기원통초>였을 것이다.
이제 균여는 더 이상 칠삭둥이 못난 아이로 태어나 버림받았던 아이가 아니었다. 해동 화엄의 초조였던 의상의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하였으며, 의상계의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원효와 법장의 화엄사상을 융회시킨 대학장(大學匠)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뛰어난 화엄의 대석학이기만 했던 것 또한 아니다. 화엄석학 균여라는 명성 뒤에 가려진 보살의 진면목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다른 승려들처럼 한문으로 저술을 집필하지 않고 향찰로 글을 썼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향찰로 저술을 남긴 덕분에 스님은 후대의 대각국사 의천으로부터 강력히 비난받기까지 했다. 당시의 지성인들이 한문이 아닌 향찰로 글을 쓰는 것을 천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종의 초빙을 받아 귀법사에 머물면서 한창 세간의 우러름을 받던 시절에도 균여는 왕공대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민들을 위해 향찰로 글을 쓰고 있다. 균여가 지어서 세상에 널리 퍼뜨린 <보현십종원왕가>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균여는 향찰로 쓴 이유에 대해 스스로 “통속적인 말을 따르지 않고서는 크고 넓은 인연을 나타낼 길이 없어 11수의 거친 노래를 짓는다. 이는 여러 사람의 눈에는 지극히 부끄럽지만 여러 부처님의 마음에는 부합될 것이다. 글을 맞추고 글귀를 지어서 범속(凡俗)의 선근(善根)을 낳기 바란다.”
글을 몰라 부처님 말씀을 직접 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일체 중생 모두를 수순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마음씀씀이를 조금이나마 닮아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혹 어렸을 때 외모로 인해 힘들었던 기억이라도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그 힘들었던 기억이 소외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게, 아니 더 극진하게 마음을 쓰도록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해서 고려의 몽매한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고려의 말로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어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균여 스님 스스로가 화엄세상의 보살을 만나 힘든 삶을 보살의 원력으로 바꾸어내었듯이, 세상 사람들 또한 자신의 원왕가를 듣고 불러서 고통받는 중생이 아니라 보살로 거듭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런 진정을 담았기에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고 하다못해 담과 벽에까지 쓰여질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부처님
지나간 세상을 닦으려 하신
난행(難行)과 고행(苦行)의 원(願)을
나는 돈연히 좇으리.
몸이 부서져 티끌이 되어 가매
목숨을 버릴 사이에도
그렇게 함을 보이리.
모든 부처님도 그러한 분일지니
아아, 불도(佛道)를 향한 마음이
다른 길 아니 비껴갈지어다.
균여 스님이 지은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王歌)> 가운데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노래(常隨佛學歌)’의 한 수이다. 몸이 부서져 티끌이 될지라도, 목숨을 버릴 지경에 처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찰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염원이 절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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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모일에 어떤 이승한 승려가 종려나무 갓을 쓰고 바닷가에 왔는데, 이름과 거처를 물었더니 스스로 비바시(과거칠불 중의 첫 번째 부처님)라고 하면서 ‘일찍이 나는 500겁 전에 이 나라를 지나다 인연을 맺었는데, 지금 삼한이 일통되었음에도 불교가 흥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세의 인연을 갚고자 잠시 송악산 밑에 와서 여자(如字, 균여)로서 불법을 널리 펴고, 지금 일본으로 가려 한다’고 말하고는 곧 숨어버렸습니다.”
균여의 입적을 놓고 단순히 입적이 아니라 중생이 다할 때까지 수순함을 멈추지 않는 보살의 변역생사(變易生死), 곧 다른 원행을 위한 보살의 나툼으로 기술하고 있다. 칠삭둥이, 부모조차 놀라서 버릴 정도로 괴이한 용모를 가지고 태어났던 아이, 그 아이가 화엄 무진 보살의 세계를 만나 백 년 뒤의 후인에게조차 보살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균여가 자신의 단점에 얽매이지 않고 보살의 원행을 실천하는 데 투철했던 보현행자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