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처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보살은 어떤 이인가?”
오른손 검지를 끊어 ‘원면살생 귀의불은(願免殺生 歸依佛恩)’을 혈서로 적어내린 후에야 원혜 대사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절에 머물 수가 있었다.
일제시대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 남경 땅에서 의미 없는 학살을 하는 자신을 보며 어느 날 도망쳐 정원사에 머무르게 된 ‘나’. 사찰 생활에 익숙해져가던 ‘나’는 선택된 불자들만 볼 수 있는 ‘금불각’ 부처님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비오는 밤 몰래 들어간 금불각에서 고뇌와 슬픔에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향로를 머리에 얹은 등신불(等身佛)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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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원작 ‘등신불’이 1982년 임혁 한혜숙 주연의 TV문학관으로 제작 방영된 이후 24년만에 다시 제작됐다. HD로 제작된 ‘등신불’은 10월 6일 밤 10시 KBS1TV HD TV문학관에서 방송을 탄다.
장형일 감독이 24년만에 다시 ‘등신불’ 제작을 지휘했다. “매년 부처님오신날마다 ‘등신불’이 재방송되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며 “이번에 만든 ‘등신불’은 보다 원작의 배경에 충실하게 촬영하기 위해 중국에서 올 로케한 만큼 이 작품이 기록에 남아 조금 덜 부끄럽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장형일 감독은 소박한 제작 감상을 밝혔다.
‘등신불’은 ‘나’가 정원사에서 들은 ‘등신불’ 만적 대사의 이야기를 통해 불성을 가진 나를 스스로 깨닫고 초월해 변해야 한다는 불교사상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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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일 감독은 “1982년작 등신불은 김동리 선생이 영화화 드라마화된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만족한 작품이라고 서신을 보내오기도 한 작품”이라며 “故 이은성씨가 쓰고 김이현씨가 각색한 극본의 대사들이 잘 구성돼서 더욱 좋았다”고 강조한다.
‘등신불’은 중국 사천 지방에서 촬영됐다. 11일박 12일이라는 짧은 일정 때문에 단 한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여산 낙산대불을 비롯해, 아미산, 석경사 등에서 촬영했다.
엑스트라를 구할 수도 없었다. 동네 주민들을 모았다. 간신히 모은 300여명은 바람 불고 비오는 장면을 찍을 때는 150여명만이 남아 촬영을 했다. 통역을 거쳐도 의사소통이 힘들어 연기 지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람 부는 장면은 광풍기로 바람을 만들어야 하는데 현지에서 광풍기라고 내놓은 것은 고작 선풍기 두 대. 그나마 한 대는 고장나서 스텝들이 부채질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비를 내려야 하는 물차도 최대 진입 거리가 500m밖이어서 수압이 떨어지는 통에 나중에 그래픽으로 처리해야만 했다.
“시간은 촉박하지 찍을 장면은 다 못찍었지, 하루만 더 찍는데 1000만원으로 된다면 내 돈을 투자해서라도 찍고 싶었다”는 장형일 감독은 “그곳이 외져 비행기가 3일에 한 번 뜬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몇 장면은 여주 신륵사에서 찍었다”고 살짜기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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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적 대사 역을 맡은 배우 성민은 “무슨 역인지도 모르고 장형일 감독님 작품이라 무조건 하겠다고 매달렸다”며 “나중에 스님역이고 삭발해야 한다고 들었지만 평생 배우할 건데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탐나는 역할을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만적 대사에 임하는 결의를 엿보였다.
만적 스님이 온 몸으로 불교의 사상을 보여줬다면 여주인공 여옥 역의 정시아씨는 말로 불교교리를 끊임없이 설명한다.
불자라서 더 대사들이 마음 속에 알알이 새겨졌다는 정시아씨는 “촬영에 앞서 배우들과 스텝들이 월정사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불교를 익혔다”며 “그때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계속 마음 속에 담아두고 대사를 할 때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신공양 장면을 위해 기름젖은 천을 감고 6시간을 고군분투하며 삭발투혼을 보여준 성민, 발이 부어서 헐렁하던 꽃신이 맞을 정도로 뛰어다니며 연기에 몰두했던 정시아가 있었기에 ‘등신불’은 더 아름답고 웅장한 영상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