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네들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원고는 쓰레기통에 던져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긴장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 하고 싶던 얘기를 다해 보련다.
나는 대구 파계사로 출가해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절에 와서 일주일쯤 지나니까 스님께서 머리를 깎아 주시면서 “도랑 청소나 하면서 잘 지내보시게” 하셨다. 나는 얼른 빗자루를 들고 도랑을 찾아 나섰지만, 절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도랑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절 마당 축대 밑에 도랑 비슷한 곳에 낙엽과 흙모래가 쌓여 있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그것들을 퍼다 버렸다. 한참 뒤에야 스님들은 절을 도량道場이라고 하는 걸 알았다. 도량과 도랑도 구별 못하는 정말이지 똥오줌 못 가리는 시절이었다.
파계사에서는 누각에서 법당을 향해 사시마지를 올리고 재를 지낸다. 그날은 재가 있어서 지장보살 정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누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이 아닌가!
그 스님이 손가락으로 내 발 밑을 가리켜서 얼른 보니, 아이쿠, 내 바지가 왜 바닥에 있지? 얼떨결에 흘러내린 바지를 끌어 올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날따라 웬 신도들이 그리 꽉 들어찼던지…….
그렇게 세월은 흘러 행자교육원을 수료하고 송광사 강원에 방부를 들여 큰방 생활이 시작됐는데, 군대 이등병 때의 긴장된 생활은 저리 가라 할 만큼 힘이 들었다. 그중 가장 힘든 것이 발우 공양인데, 어른 스님들보다 늦지 않게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죽비 소리에 맞춰 마치 포크레인이 대형트럭에 흙을 퍼담듯이 먹어치워야 했다.
그날 공양 때에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숟가락이 입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니 내 숟가락이 발우 속에 또 하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들고 있던 숟가락은 대중 스님들이 찬상에서 반찬을 더는 데 쓰는 것이었다. 살그머니 돌아보니, 눈치 챈 스님이 없는 것 같아서 살짝 찬상에 도로 내려놓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거 부처님만 아세요.’
드디어 치문반 소임 중에 제일 힘들다는 도량석 차례가 되었다. 평소에 염불을 잘 못해서 떨리기도 하고, 그날따라 감기 기운이 있어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자명종 소리에 2시 30분에 일어나 큰법당에 불을 켜고, 3시 정각에 목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목이 꽉 잠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밤사이에 감기가 더 심해져서 목이 부었는지 힘을 주는데도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량석은 돌아야 하니까 젖 먹던 힘까지 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벽예불을 마치고 큰방에 돌아와 가사장삼을 벗는데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스님은 정랑에서 내 도량석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소변이 안 나오더라고 하고, 어떤 스님은 목탁이 하도 느려서 목탁 들고 어디 가는 줄 알았다고 하는가 하면, 웬 절에서 새벽부터 돼지를 잡나 했다는 스님도 있었다. 내 도량석 덕분에 그날 오후 치문반 스님들은 윗반 스님에게 도량석 습의를 제대로(?) 받았다.
지금까지 고백한 내용은 사실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었는데, 다 털어놓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내가 본래 근기가 모자라서 실수를 많이 하긴 하지만, 부끄러운 줄 알고 하나하나 고쳐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부처님같이 마음이 활짝 갤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