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말미암아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리대신 문명의 길을 택했고 살길을 찾아 하나둘씩 도시로 떠났다. 그렇게 시대는 변해 갔고 이제 우리의 ‘효문화’도 점점 그 빛을 바래가고 있다.
15년째 남원시 대산면 운교리 이장직을 맡고 있는 진상호씨(68). 진 이장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13년째 ‘혼정신성’의 도리를 자청해오고 있다. 애초에는 열 한분의 어르신들의 집을 돌며 문안을 드렸지만 그동안 노환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지금은 서순경(93), 정애돌(83), 강정순(76) 세 분의 할머니들에게 조석으로 문안을 여쭌다. 진 이장의 문안인사는 단순히 문안인사로만 그치지 않는다. 겨울철에 눈이 내릴 때면 할머니들 집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은 물론 겨우내 할머니들의 구들장을 따뜻이 덥혀줄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것도 진 이장의 몫이다.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하는 땔감은 무려 경운기 20대 분량이다.
| ||||
“‘아파트에 혼자 살던 노인이 사망한지 5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도 몰랐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어르신들이 오히려 저를 친자식처럼 여겨주시니 제가 더 고맙죠. 따지고 보면 모두 내 부모님 같으신 분들 아니겠습니까.”
진 이장은 세 분의 할머니 중 강정순 할머니에게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5년 전부터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한 강정순 할머니를 부축해 하루에 두 서 너번씩 동구 밖까지 함께 걸으며 ‘어서 빨리 기운 차리셔서 농사일도 해야죠’라며 할머니의 기운을 돋구어 드리는 일은 이젠 자연스런 일과가 돼버렸다.
이런 진 이장의 봉사에 강정순 할머니는 “자식보단 이장님이 훨씬 고맙구만유. 자식들이야 제 살기 바쁘다 보니 명절에만 얼굴 내 비치니 어디 우리 진 이장님한테 비교허겄시유”라며 눈물을 훔친다.
진 이장의 봉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10년 전 마을 어귀에 ‘꽃동산’을 만들어 아름다운 농촌 만들기에 앞장섰으며 작년에는 사재를 털어 게이트볼 장을 조성해 동네 어르신들이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다. ‘교육에 농촌의 미래가 달렸다’는 소신으로 20년째 이어오고 있는 장학사업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진 이장은 1년에 한번 대산면 출신 대학생 2명과 고등학생 3명에게 각각 30만원과 20만원씩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는 이유는 농촌에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 못지않게 살기 좋은 농촌이 된다면 누가 농촌을 떠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을 도시 못지않은 문화환경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죠. 일부러라도 ‘꽃동산’이며 ‘게이트볼장’이며 ‘장학사업’에 더 투자하고픈 게 제 욕심입니다.”
진 이장의 땀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400평 규모의 ‘꽃동산’이 완성되기까지는 사연도 참 많았다. 진 이장을 시기한 사람이 화단을 만들기 위해 사놓은 진흙과 부엽토, 잣나무와 소나무 등을 개울에 버리거나 아예 훔쳐가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1년 동안 묵묵히 꽃동산 조성에 땀 흘리는 진 이장의 모습에 마을사람들도 서서히 동참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도움으로 꽃동산 조성을 위한 공사는 더 빨리 그리고 더 아름답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게이트볼 장을 짓기 위해 부지를 매입하는 데도 여간 곤욕을 치루지 않았다. 땅 주인이 땅 값을 턱없이 높게 불러 이득을 보려했기 때문이다. 진 이장이 사재를 털고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얼마의 돈을 모았지만 땅 주인이 요구하는 값에는 훨씬 못 미쳤다.
마을의 발전과 어르신들을 위한 체육시설을 만드는 것보다 ‘이 기회에 한 몫 잡고 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땅주인에게 화가 난 진 이장은 여섯달 동안 끈질기게 땅주인을 설득해 결국 지금의 게이트볼 장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진 이장은 남원시장·대산면장 표창 등을 받았지만 ‘할 일 한 것 뿐인데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친다.
| ||||
자신의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남원에서 뿌리를 내리고 흙을 일구며 살아 온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진상호 이장. 그의 꿈은 역시 흙에서 얻어진 돈으로 마을 어르신들을 편히 모시는 것이다.
“허허, 푼푼이 모으고 있는 돈이라 언제 만들어질지는 모르겠어요. 작은 규모라도 어르신들 편히 지낼 수 있는 ‘실버타운’ 하나 만드는 게 마지막 소원이자 꿈입니다. 빨리 만들어 놓고 죽어야 할 텐데 큰 일이내요. 큰일…. (후~) ”
진 이장은 앞으로 10년 안에 실버타운을 짓기 위해 야산 2300평을 매입해 콩과 고사리를 4년째 재배하고 있다. 하지만 진 이장은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중국산 콩과 고사리가 국산의 절반도 안되는 값으로 수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래에는 고부가가치 작물인 더덕과 인삼을 심어 콩과 고사리를 대신하고 있다. 또 내년부터는 농촌체험과 자연학습을 할 수 있는 ‘농촌체험실습장’을 만들어 도시인들과 초중고 학생들에게 농촌의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자식들의 도움 없이 농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전하며 ‘제2의 새마을 운동’을 펼치고 있는 ‘꿈꾸는 농촌 일꾼’ 진상호 이장. 알알이 실한 누렇게 익은 가을 들녘 벼이삭만큼이나 그의 꿈도 그렇게 익어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