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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서도 “형상이나 음성으로 (부처를) 찾으려 하는 것은 사도(邪道)일 뿐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불교에서는 불상을 장엄하는 데 온갖 정성을 쏟고, ‘공(空)’을 설파하는 경전조차도 정교한 수사(修辭)를 동원하는가?
불교의 모든 경전과 의식, 심지어는 사찰의 전각들도 모든 중생들을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하는 ‘뗏목’과 같은 것이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느냐”는 선사들의 다그침도 일종의 ‘뗏목’이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서는 의식을 장엄하고 정교히 하는 데 공력을 쏟는다.
종교는 개인 차원의 신앙이 아니다. 교주, 교리 체계, 신도 그리고 고유의 경배 방식이나 의례를 갖출 때 비로소 종교가 되는 것이다. 한국불교도 1,6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고유한 의식 체계를 다듬어 왔다. 대표적인 예로 ‘도량석’은 한국불교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경전이나 의식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많은 재가불자나 초심자들에게는 ‘알 듯 말 듯’한 그 무엇이었다. 무턱대고 따라 외는 것도 하나의 수행 방편이긴 하지만, 수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조계종 포교원에서 ‘한글통일법요집’을 완간했다. 실로 수희찬탄할 일이다. 법요식과 상용의식에 쓰이는 의식문과 경전을 한글화했다. 한문과 달리 한글은 ‘조사’와 ‘어미’가 문장의 성분과 문법 자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음조와 운율을 살리기 어렵다. 이 점은 앞으로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다듬어질 것으로 본다. 기우이겠지만, 이런 보완점을 빌미로 현장에서 한글 의식문을 상용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의식’도 수행이다. 형식과 내용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점을 인식하여야만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생활화의 의미를 살려낼 수 있다. 이번에 발간된 ‘한글통일법요집’이 획기적인 계기가 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