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3.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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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년에 하안거…“살아있는 禪 강단에서 펼칠 터”
[인터뷰]법산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동국대 선학과 법산 스님
올 여름 벽송선원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동국대 선학과 교수 법산 스님(사진)의 얼굴은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8월 23일 동국대 정각원에서 만난 스님은 1976년 통도사 극락암 동안거 이후 30년만의 하안거를 회상하면서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연구년을 맞은 스님은 올 여름 지리산 벽송사 대중선방에서 하안거를 났다. 법산 스님은 경봉 스님이 주신 ‘이뭣고’ 화두에 목숨을 걸고 일대사를 해결하려 용맹정진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래서인지 “엄격한 선원의 청규에 따라 스스로를 점검 받는 동안 새롭게 수행의 참맛을 느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무엇보다 가을학기부터 이번 대중선방에서의 실참 경험을 살려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선학을 지도할 수 있게된 점도 또하나의 소득으로 꼽았다.
법산 스님은 안거동안, 깨달음을 얻는데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에 예불이나 울력에 빠지지 않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숨소리까지 조심하면서 산란한 마음을 조복 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스님은 “70년대 선방의 모습에 비해 정진 열의가 치열하지 못한 점은 다소 염려스러웠다”고 밝혔다. 경봉 스님같은 명안종사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공부를 점검 해주는 조실스님이 없어 공부에 대한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9월 8일부터 벽송사 선주 월암 스님과 선회(禪會)를 복원하는 일이다. 법산 스님은 “수행의 준비단계를 모르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다”며 “자기점검의 기회가 부족한 요즘 같은 때일수록 교학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선(禪)과 교(敎)의 조화를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실제 대중선방을 경험한 소감은
선방에 방부를 들인 것이 30년 만이다. 76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동안거 방부를 들인 것이 마지막이고 그 뒤로 학교와 해외에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물론 이후에도 아침저녁으로 생활선을 해왔지만 계속 해왔지만 이번처럼 대중처소에서 함께하는 실참의 기회는 없었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선원의 청규에 따라 스스로를 점검 받는 계기가 된 데다, 요즘 선원의 참맛을 봤다고 할 수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나이도 있고 걸음도 불편해서 대중생활을 하는 선원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스님은 젊은 시절 다친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근육이 없다. 지금도 스님의 오른쪽 다리는 꼬챙이처럼 말라있다). 그래도 젊은 시절 하루 13시간씩 정진하던 이력을 믿고 더 늦기 전에 당당히 방부를 신청했다.

30년 만의 대중결제 경험을 털어놓은 법산 스님
▲벽송사 선원에 방부를 들이게 된 이유는?
지리산에서도 오지인 함안 마천 벽송선원벽은 우리 선종사에 매우중요한 곳이다. 보조와 태고보우의 선맥이 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으로 이어졌는데, 벽송사는 벽송지엄이 행화(行化ㆍ수행과 교화)를 한곳이다. 또 청허휴정이 선가귀감을 집필해 선교의 바른 이치를 펴 선가의 종지를 심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대중생활에서 힘든 점은 없었나?
대학에서도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저와 함께 깨달음의 도반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을 얻는데 모두가 평등하다. 벽송사 대중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40대 선객들이지만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숨소리 까지 조심하면서 산란한 마음을 조복 받았다. 물론 예불이나 울력에도 열외는 없다. 규칙적인 생활에 체중도 줄고 건강이 되레 좋아졌다. 해제하고 하산한 지금이 더 불편하다. 엄두도 내지 못했던 산행도 자유롭게 다니고, 전공이 보조 스님이면서도 한번도 찾아보지 못했던 보조 스님의 개오처 상무주암을 참배한 것도 큰 기쁨이었다.

▲하안거동안 가장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경봉 스님이 주신 ‘시심마(是甚磨 이뭣고)’ 화두를 들고 있는 동안 온갖 자연의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있어도 자연환경이 공부를 시켜준다는 느낌이었다. 3~5시까지 새벽정진을 마치고 문을 열면 눈이 시리도록 지리산의 녹음이 펼쳐지고 맑은 공기가 얼굴과 피부를 확 감싼다. 지리산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그대로가 환희다. 선농일치의 전통이 이어져 차와 먹을거리를 대중들이 손수 마련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요즘 선원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70년대 선방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전처럼 수행의 열의가 치열하지 못한 것은 다소 염려스러웠다. 개인적으로 경봉 스님 같은 명안종사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공부를 점검 할 수 있는 조실스님이 없어 공부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선회를 복원하기로 했다는데?
학교에서 후학들에게 선학을 가르치면서도 이론보다는 실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렇다고 이론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이론은 실천을 이끄는 안내자다. 선도 수행의 준비단계를 모르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다. 보조 스님은 스승 없이 경전과 어록을 스승으로 삼았다. 경전과 어록으로 선의 기본을 삼고, 자기점검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선주 월암 스님과 고민한 것이 9월 8일부터 시작되는 선회(禪會)의 복원이다. 요즘 같은 때일수록 더욱더 교학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조용수 기자 | pressphoto@buddhapia.com
2006-08-27 오전 9:37:00
 
한마디
선, 마음 씀씀이가 최고인것이 진짜 선이다. 그래서 선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모두 자비롭고 방하착한다. 매사에 못된 마음 먹고, 자리다툼질 한사람은 선을 모른 사람이라! 선이라는 것, 학문으로 연구도 하고, 실참실수도 할 수 있다.. 선이 무엇인가? 화두풀이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간단하마음 보따리 잘 쓰는 법을 닦는 사람이 진짜 선사요, 선하는 방법을 쉽게 가르치는 사람이 선학자라 할 수 있다. 선원에서 자리싸움질. 불교대학에서 감투 싸움박질 하는 사람들은 선을 악용하는 마구니같은 사람이다.
(2006-09-07 오후 1:23:30)
70
선무당 사람잡네 그려.
(2006-09-06 오후 9:30:27)
62
선학 전공 교수가 선실수를 한 것이 기사꺼리가 되는가? 그동안 선을 이론으로만 공부하고 실참은 전혀 않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는 죽은 선을 했고,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선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이해된다.
(2006-09-01 오전 12:38:23)
152
존경하는 법산스님, 늘 인자한 스승의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2006-08-28 오전 10:34:56)
154
선학 연구도 해야겠지만, 그동안 교수신분으로 하기 어려웠을 안거에 드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죠.
(2006-08-27 오후 6:11:25)
155
선학과 교수의 연구년은 선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하는 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006-08-27 오후 2:03:39)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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