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법등 스님은 8월 3일 현등사 사리구 반환 소송 기각 결정과 관련해 서울서부지방법원장 앞으로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중앙종회 의장 법등 스님은 공개질의서에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몇 차례씩 전소되고 재건된 경험을 갖고 있음에도 그 법통과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지적하고, “현등사가 1829년에 전소되기는 하였으나 그 후 1년 만에 재건하는 등 800년 동안 대가람의 풍모를 이어온 것을 고려할 때 현등사에 사리구가 봉안된 1470년대의 현등사와 현재의 현등사가 동일성이 없다는 판결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또 “이번 판결은 종단의 법통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는 헌법 전문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영토로부터 독립한 신생독립국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재판부의 역사 몰인식을 지적했다.
이어 법등 스님은 질의서 마지막에서 “재판부의 판결이 삼성이라는 대재벌을 성역으로 생각해 내려진 것이 아니냐”며 이번 판결의 배경이 재벌눈치보기가 아니냐는 의혹을 던졌다.
다음은 서울서부지방법원장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 전문.
서울 서부지방법원 법원장께
2006. 7. 20. 오후 2시 서울서부지방법원 민사 13부(재판장 신성기)는 대한불교조계종 현등사가 삼성문화재단(이사장 이건희)을 상대로 제출한 ‘동산(현등사 사리구) 인도 청구의 소’에 대하여 원고 패소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삼성문화재단이 불교성물인 사리구와 사리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전혀 판단하지 않은 채, 옛날의 현등사와 지금의 현등사가 전혀 다른 사찰이라고 판단하여 대한불교조계종 현등사의 법통을 부정하고 삼성문화재단의 도난된 불교성물 보유를 정당화시켰습니다.
즉 재판부는 “현등사는 본사가 아닌 말사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대참화를 거치고, 이 사건 사리구가 봉안된 이후 숭유억불정책을 편 조선시대 400여 년 동안을 사찰의 동일성을 유지한 채로 존속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데다가,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조선불교의 효율적인 관리 통제를 위하여 조선불교 교단의 대정비가 이루어지고, 전국의 토지에 대한 조사사업을 실시하여 현대적 의미의 소유권을 원시취득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불교교단의 통폐합 조치가 취해짐으로써 사찰의 물적, 인적 요소에 커다란 변혁이 수없이 이루어져 왔다”고 전제한 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원고는 비록 구현등사와 명칭은 같더라도 그와는 다른 별개의 권리주체라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며 패소의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는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다음과 같이 공개질의합니다.
1. 대한불교조계종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사찰로 1210년 보조 국사 지눌 스님에 의하여 중창된 이래, 1829년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이듬해 온 대중이 힘을 합쳐 다시 그 터에 재건한 이외에는 800여 년 동안 대가람의 풍모를 한 번도 잃지 않고 잘 간직해온 천년고찰입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찰은 임진왜란 등 많은 국란과 일제시대, 그리고 한국전쟁 과정에서 대개 몇 차례씩 전소되고 승려와 신도들이 피난하여 일정 기간 버려져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등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에서도 소실되지 않고 사격을 유지하였던 바, 현재의 현등사가 사리구가 봉안된 1470년대의 현등사와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귀원은 중수된 전국의 거의 모든 사찰이 과거의 사찰과 다른 사찰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현재 불국사는 신라시대 불국사와는 전혀 다른 사찰이며, 작년에 전소되어 새로 중수하고 있는 낙산사는 작년 이전의 낙산사와 전혀 다른 사찰이므로 모든 재산과 문화재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2. 현등사는 1980년 현등사탑에서 사리구를 도굴당했고, 도굴한 당사자의 진술이 법정에 제출된 바 있습니다. 귀원의 민사제13부는 현등사의 동일성을 부정함에 있어서 이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귀원은 1980년의 현등사와 지금의 현등사가 전혀 다른 사찰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3. 대한불교조계종은 종헌 제1조에서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원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 일본강점기 당시의 조선총독부에 의한 조선불교 교단의 정비, 해방 이후 불교 교단의 통폐합 조치 등 위정자들에 의하여 사찰의 물적ㆍ인적 요소가 변화하였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현등사가 동일한 사찰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귀원은 현 조계종단이 과거의 조계종과 전혀 법통이 연결되지 않은 신생종단이고, 현 조계종단의 종헌은 거짓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4. 귀원은 대한민국의 모든 사찰이 과거 사찰과 물적 인적 요소가 다른 별개의 사찰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찰부동산의 점유자에 불과한 현재의 사찰들이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방안이 궁금합니다.
또한 모든 사찰문화재가 소유권자가 없으므로, 국유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갖고 있습니까?
그리고 전국의 모든 사찰에서 과거에 만들어진 문화재가 도난당한 경우, 해당 사찰은 소송을 통하여 찾아올 방법이 없다는 판단을 갖고 있습니까?
5. 일제 침략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통치권이 박탈당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통치권이 전혀 한반도에 미치지 못했다할지라도, 국권회복의 의지를 갖고 활동한 이상 대한제국의 권리, 의무는 임시정부를 통하여 대한민국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이것은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귀원은 36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있었다는 사유로 대한민국을 과거의 역사와 단절된 일본의 영토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로 판단하고 있습니까?
귀원은 과거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해외로 유출된 왕실소유 문화재에 대하여 국가의 동일성이 없다는 사유로 반환받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더욱이 과거 오대산사고의 지킴이 역할을 하였던 월정사가 주축이 되어 일제시대 강탈당한 조선왕조실록을 반환운동을 펼쳤던 것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억지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6. 그간 법원은 유서 깊은 사찰을 그 자리나 인근에 복원시킨 경우 조계종과 해당 사찰의 법통을 인정하여 사찰의 동일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철원 건봉사와 고성 도피안사의 경우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수십 년 후 복원되었으나, 법원은 조계종의 법통을 인정하여 사찰의 동일성과 그 전래의 부동산 등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여, 결국 건봉사는 도난당한 부처님의 치아 진신사리를 찾아 적멸보궁에 봉안할 수 있었고, 도피안사는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법당에 봉안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 법원은 400여 년을 소실된 상태로 있었던 회암사에 대하여, 조계종의 법통이 면면히 이어졌음을 이유로 사찰의 동일성을 인정하여, 국가를 상대로 한 문화재 반환소송에서 승소판결하였습니다.
불자들은 이렇듯 전래와 사뭇 다른 이번 판결이 나온 사유가 오로지 대재벌을 상대로 소송한 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귀원에 묻겠습니다.
이 번 사건에서 귀원이 삼성측의 권위에 손상이 갈 수 있는 도난문화재 여부 등에 대한 판단 없이, 조계종 사찰의 법통을 거론하여 삼성을 상대로 한 반대편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 것을 볼 때, 귀원은 대재벌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장 법등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