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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칠월칠석(7월 31일)을 앞두고 법보종찰 해인사(주지 현응)가 산문을 활짝 열었다. ‘사랑 만남 생명’을 주제로 비로자나데이 ‘천년의 사랑’ 축제를 연 것이다.
구광루 앞마당엔 영화 ‘왕의 남자’에서 봤던 남사당패의 외줄타기용 밧줄이 떡 하니 매어 있고, 보경당 앞에 설치된 대형무대에선 오후 3시부터 젊은 국악그룹 이스터녹스의 퓨전국악공연과 4인조그룹밴드 비즐리의 뮤직 콘서트가 펼쳐졌다. 종무소 뒷마당엔 사하촌 마을주민들이 먹을거리 장터까지 풍성하게 열었다.
종무소 앞 컵등 만들기 체험장, 손가락에 알록달록 꽃물을 들이며 직접 만든 컵등이 예쁘다. 홍보관에는 통일신라시대 문장가였던 각간 위홍과 진성여왕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시화전이 눈길을 끈다. 2004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김선우 시인이 특별히 지은 12편의 시가 천정의 그림을 배경으로 빛을 발하며 대중들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종무소 앞마당엔 사회복지기금 모금을 위한 백련차 시음회가 열렸다. 정성껏 우려낸 백련차의 향이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려는 뜻과 더불어 더 그윽하게 번졌다.
#고찰서 사랑축제?
전국에서 모여든 3천 여 대중은 해인사의 색다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렇다. 한국사 항상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는데, 오늘만큼은 문도 없고 턱도 없는 해인사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해인사에서 처음 열린 비로자나데이 축제에 의아한 표정이다.
“지난해 해인사에는 경사스런 일이 있었습니다. 두 분 비로자나 부처님이 탄생한 것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로 판명된 비로자나 부처님은 1200년 전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과 당시 정치가이며 문장가였던 각간 위홍의 사랑과 서원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이 두 분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우리 고유 사랑의 날인 칠월칠석을 비로자나데이로 정하고 온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축제를 마련한 것입니다.”
기획국장 만우 스님이 대중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스님은 “비로자나부처님에게 생일을 드린 것”이라며 “오늘만큼은 해인사에서 비로자나부처님의 자비광명과 가야산 정기를 가득 담고 돌아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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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를 넘기며 천이백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 ‘장생’ 대역으로 나온 줄꾼 권원태의 제자 김민중(16)군이 멋진 재담으로 줄을 타려는 순간, 천둥번개를 동반한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내렸다. 끝나지 않은 장마로 오전 내내 흐리더니 결국 구름이 터진 모양이다. 비로자나데이 축제가 막 무르익을 무렵인데 더 이상 축제가 진행되지 못할 듯 했다. 주지 현응 스님을 비롯한 사중스님들은 물론 축제에 막 젖어든 대중 모두가 안타까워 했다.
비로자나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빛’ ‘광명’을 뜻한다. 결국 비로자나부처님의 광명은 대중을 외면하지 않았다. 거세게 내리던 빗줄기가 잦아들더니 어느새 파란하늘 자락을 살짝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사 우리사랑 이루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듯 그대를 사랑합니다. 건강과 평화가 사랑 속에 내 사랑은 해인의 마음을 향합니다.”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의 사랑처럼 모두의 사랑이 천년을 이어갈 큰 사랑으로 승화되길 발원하는 현수막이 더욱 새롭게 빛났다.
#종정 법전 스님도 참석
오후 7시, 김선우 시인의 축시 낭송으로 축제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광루 앞 회랑에 현응 스님을 비롯한 어른스님과 사중스님 이명박 前 서울시장이 자리했고, 종정 법전 스님이 대중들에게 축복을 내리며 등단했다. 법전 스님의 등단에 3000여 대중은 일제히 환호했다.
가야산이 붉은 노을로 물들 무렵 패션디자이너 이영희씨의 ‘사랑과 만남의 패션쇼’가 시작되고 김종국의 미니콘서트 ‘한여름밤의 꿈’과 불자국악인 김성녀의 무대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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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부터 시대별로 변화되어 온 우리옷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 패션쇼는 관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했고, 가수 김종국의 무대는 산사를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남자’ ‘사랑스러워’를 잇따라 부른 김종국은 “해인사는 어린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고향”이라며 “오늘의 행사는 해인사의 행사라기보다 가족의 일이라는 생각에 주저 없이 달려왔다”고 말해 더 큰 박수를 받았다.
#가족·연인과 ‘천년의 사랑’ 기원하며 회향
다채로운 무대공연이 모두 끝나고 해인사의 밤이 깊어갈 무렵 각간 위홍과 진성여왕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시극 “사랑이여, 천년의 사랑이여!”가 시작됐다.
진성여왕과 위홍의 사랑이 비로자나부처님을 조성하면서 만 생명에 대한 사랑, 생사를 넘어선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되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시극은 퓨전국악과 월드뮤직연주, 현대무용, 판소리, 굿포퍼먼스, 시낭송 등이 어우러져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극을 쓴 최창근씨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통해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위홍과 진성여왕의 독백을 끝으로 무녀 포퍼머가 굿포퍼머스를 통해 막을 내리고 사랑의 탑돌이에 나섰다. 가수 한영애씨가 앞장을 서고, 시극의 주인공들이 뒤를 따랐다. 이어 관객들이 한 손에는 컵등을 밝혀들고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의 손을 꼭 잡은 채 뒤를 따랐다. 대적광전 앞의 탑을 돌고 야광으로 밝혀진 사랑의 해인도를 따라 천년의 사랑을 발원하는 탑돌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해인사의 밤은 깊어갔다.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에서 온 이영희씨는 결혼 4년차. “가족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기원한 뜻 깊은 자리였다”고 밝혔다.
‘천년의 사랑’ 축제가 감동적이었다는 거창 웅양중학교 배은미 교사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해인사라는 곳에서 만 생명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 천년의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뜻 깊은 날로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