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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을 30여 년간 모셨던 김봉수(광명화) 보살이 지난 7월 25일 107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28일 원당암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유족은 물론 해인총림 원로 스님 등 100여명이 참석했으며,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이 직접 축원을 하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광명화보살은 통도사 경봉 스님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혜암 스님의 은사였던 인곡 스님을 10여 년간 모셨고, 혜암 스님을 30여 년간, 다시 현 원당암 감원 원각 스님까지 3대에 걸쳐 시봉했다.
또 60여명의 보살들과 함께 천 조각을 모아 스님들의 법복을 만들고 전국 사찰을 순례하기도 했다. 특히 팔순에 접어든 1979년 부터는 아들 셋, 딸 둘 손자손녀를 둔 다복한 가정이었지만 속가와의 인연도 끊고 안거결제 수행을 실천했다. 광명화보살의 손녀인 지은 스님은 일찍이 불가에 입문, 현재 안동 염불원 주지로 있다.
다음은 2002년 1월 9일자(351호) 현대불교신문에 실렸던 기사.
“큰 도인 따라 다니며 공부 영광”
“스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울 필요 없어. 이제 다 던져버리시고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셨는데 뭐가 슬퍼?”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의 입적을 소리없는 슬픔으로 삭히면서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의연함을 보이는 103세의 김광명화 보살. 혜암 스님의 은사 인곡 스님을 모신 인연을 계기로 50년이 넘는 세월의 인연 속에 30년을 공양주로 혜암스님을 시봉했던 김보살은 “이제 나도 본래의 자리로 가신 큰 스님의 빈 자리를 지키다가 갈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며 담담히 말한다. “혜암 스님은 참으로 도인이셨지. 언젠가 원당암 달마선원에 기와를 올리는 날이었어. 그날따라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걱정을 했어. 기와를 다 올리기 전에 비가 오면 서까래가 쉬 썩어 건물이 이내 상하거든. 그런데 큰스님께서 ‘용왕아 너 잠자느냐’고 크게 세 번을 외치셨어. 누굴 꾸지람 하는 듯 했지. 아, 그런데 바로 비가 그쳤어. 다 그친 게 아니라 큰절(해인사)에는 내리고 원당암 일대는 그친 거야. 그래서 우리는 큰 스님의 도력이 하늘을 움직인다는 걸 알았어.” 원당암 103세 ‘상보살’ 김보살은 원래 마산 출신이지만 혜암 스님의 수행처를 따라 다니느라 ‘전국구’가 됐다. 쌍계사 칠불암, 문경 봉암사, 태백산, 오대산 등지의 수행처를 거쳐 30여 년 전부터 원당암에서 혜암 스님의 공양을 도맡았다. 원당암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는 절 살림이 가난하여 고시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해야 했다. 그때 혜암 스님은 하루 한번 드시는 식사임에도 그나마 누룽지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고 회고한다. 김보살은 “그때는 찬거리가 될 만한 것을 구하느라 산을 헤매 다니며 나물 뜯기에 하루해가 짧았지”라며 어려웠던 시절을 돌아보는 듯 잠시 눈빛이 아련해 졌다. “공양이라야 특별한 것은 없었어. 큰스님은 하루에 한 끼만 드셨고 소식(小食)을 하셨기 때문에 반찬걱정을 하거나 끼니때가 돌아오는 걸 신경 쓸 일은 별로 없었거든. 무김치와 동치미를 워낙 좋아 하셨지.” 김보살은 혜암 스님에 대해 너무나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일일이 입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평소 친분 있던 사람들이 젖은 눈으로 노보살의 손을 잡으면 자신도 모르게 혜암스님에 대한 얘길 꺼내곤 했다. “산꽃·들꽃 좋아하셨지” “문경 봉암사에서 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였어. 나는 담석 때문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지경이 되었는데 큰스님께서 뜰 앞의 풀을 뽑으라고 하셨지. 하지만 나는 몸도 가누기 힘든데 어떻게 풀을 뽑느냐며 문 밖으로 겨우 나갔어. 그 때 갑자기 큰스님이 소리를 치셨어. ‘보살, 몇 푼어치나 아프요?’ 그 순간 나는 몸이 가뿐해 지면서 뭔가 머리를 스치는 것을 알았지. 그때부터 나는 ‘이 뭐꼬’ 화두를 받은 셈이야 그 뒤로 화두를 놓지 않고 스님을 모시며 나름대로 정진을 해 왔어. 큰스님께서 늘 ‘화두 놓치지 말라’고 독려를 하신 힘에 의해서 말이야…” 무엇보다 김보살은 “공부하다가 죽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강조하신 그 가르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가르침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혜암 스님의 주장자였다는 것. “참으로 꽃을 좋아하셨지. 산꽃 들꽃들을 좋아하셨어. 그래서 원당암과 미소굴 주변에는 늘 꽃이 많았고 큰스님이 직접 꽃씨를 뿌리시곤 했어. 일체 중생이 다 꽃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원당암의 ‘상보살’ 김광명화 보살은 “이 세상에 나서 큰 도인을 따라 다니며 공부하고 시봉한 것은 큰 영광”이라며 큰스님의 법구가 모셔진 해인사를 향해 조용히 합장했다. 해인사 = 김두식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