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이 땅의 민중들은 관료들의 부패로 살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왜구 출몰로 바닷가 주민의 삶은 더욱 피폐했다. 이들에게 희망은 56억7000만년 후에 출현하는 미륵부처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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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빨리 미륵불이 출현하기를 발원했다. 계곡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와 참나무를 묻었다. 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 침향(沈香)이 되어 땅위로 나투면 미륵세계가 될 것이라 발원했다.
향나무를 묻은 그 자리에 증표를 남겼다. 매향비이다. 길에서 흔히 보는 투박한 돌덩어리에 울퉁불퉁 몇 자 적은 것이 전부다. 현재까지 발견된 매향비는 20여기에 이른다. 대부분 서해안 바닷가에 있다.
세종실록에 보면 “나주 목사 권극화가 신안 팔금도에서 땅에 묻힌 향과 비석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남 사천에 있는 매향비는 비교적 글씨가 많이 남아있어 보물 614호로 지정됐다.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땅에 처음 불상과 경전을 들여온 법성포에도 매향이 이뤄졌다. 와탄천과 법성포가 만나는 입암마을이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1371년, 1410년 두 번에 걸쳐 매향의식이 있었다. 지금은 일제 때 간척으로 갯벌이 논으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매향비 앞에까지 배가 닿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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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 하연식(82) 씨는 “매향비인줄도 모르고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배의 닻줄을 매던 ‘빗돌’로 불렀다”고 증언한다. 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꽃동산으로 밀려났다가 마을 제방이 무너지자 둑을 막는 돌이 되었다. 그 뒤 매향비를 찾아 마을을 방문하는 이가 늘어나자 ‘빗돌’에 글씨가 새겨졌던 것이 기억났다. 당시 마을이장이던 하 씨가 제방에서 돌을 꺼냈다.
60년대 말, 입암마을에 가뭄이 들었다. 매향비에서 50m 쯤에 있던 옹달샘을 파자 검고 단단한 나무가 나왔다. 침향이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침향의 소중함을 알아보지 못했다.
수백년간 갯벌에서 소금물에 다져진 침향은 단단하기가 쇳덩이와 같다. 향을 피우면 그을음이 나지 않으며 은은한 향내가 멀리간다. 벌레가 접근하지 않아 스님들의 사리함 내부에 쓰이기도 한다. 고급 약재로도 쓰였고 견줄 수 없는 향의 신성함으로 금과 같은 무게로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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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총림 방장 수산 스님은 “매향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가뭄을 대비해 묻었다”고 주장한다. 흉년이 들면 갯벌 위로 올라오는 침향을 가져다가 양식으로 바꾸도록 한 것이다. 그 뒤 희유하게도 흉년 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침향이 나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매향도 전설이 되어버렸다.
수산 스님은 “침향을 찾겠다고 갯벌을 파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매향은 천 년 전에 묻어놓은 ‘나눔의 향’이고, 주위에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돕는 것이 침향이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