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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예천불교청년회에 가입한 후 약 20년 동안 예천불교의 중심에서 실무를 보며 지역불교발전을 이끈 장본인이다.
그래서 예천불교를 알려고 하면 김 국장에게 물어보라고 할 정도다.
김 국장이 예천불교청년회에 가입할 당시 예천에는 제대로 활동하는 재가불자단체가 없었다. 예천불교청년회조차도 결성된 지 겨우 8개월 남짓 되었을 때다.
김 국장은 예천불교사암연합회가 포교당을 마련하고 재가불자단체가 태동할 시점에 예천불교청년회에 들어가 예천불교청년회장과 장년층의 모임인 정법회장을 10년 이상 역임하고, 예천불교연합신도회가 결성되는 시점부터 지금까지 또 다시 8년을 넘게 예천불교연합신도회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담당해왔다.
김 국장이 신명을 바쳐 불교활동을 해 온 20년 동안 예천불교는 많이 변했다. 20년 전 모래알 같았던 재가불자들의 활동이 조직적으로 이어지면서 청년회, 정법회 연합신도회가 결성됐다. 그동안 김 국장은 스님과 재가사이에서 중재역할도 하고 일의 선후를 따져 원만한 회향을 이끌었다.
특히 8년 전 큰 비로 포교당이 문을 닫게 된 상황에서 군의 힘도 빌리고 재가불자들을 상대로 5000등 불사를 통해 포교당 불사를 한 후 정법회의 이름으로 인수한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김 국장은 이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모두의 도움으로 이뤄져 왔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인연이 닿아 불교활동을 했고 불교가 좋아 조건 없이 활동했다”는 김 국장. 남들 다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름다운 싱글로 살고 있는 김 국장에게는 불교활동이 주업이고, 직업은 부업이다. 그래서 남본리에서 대원칠공사라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그는 대원사 주지(?)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김 국장은 20년 전 예천불교청년회 첫 법회에 참석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김 국장은 “아마 불교를 몰랐다면 어려운 삶을 정말 힘겹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2000년 가을 1억이 넘는 부도를 맞았을 때도 모든 일에 순응하는 법을 배웠기에 보다 쉽게 그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김 국장은 시종일관 인연법을 말한다. 불교를 만난 것도 불교활동을 하는 것도 모두 인연법에 의한 것.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로 자란 것도 불교와 인연을 맺기위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이제 김 국장은 다시 시절인연이 도래한 듯 예천불교회관 불사를 위한 큰 원력을 세우고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다. 8년 전 포교당불사를 하면서부터 떠올렸던 숙원사업이었다. 매년 정월 윷놀이운영비에서 1~2백만 원씩을 남겨 모은 금액이 7백만 원이 모였고, 사암연합회 스님들이 십시일반 불사금을 약속하며 불교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자는 결의까지 이끌어냈으니 이미 큰 걸음을 뗀 셈이다. 김 국장은 이제 모든 역량을 불교회관건립에 집중할 계획이다. 예천불교회관은 불교인 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위한 지역사회문화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청소년 포교 등 지역포교활성화도 이끌게 된다.
김 국장은 지난 부처님오신날, 지금까지의 불교활동을 인정받아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을 받았다. 지역스님들이 추천한 것이다. 김 국장에겐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 그는 내세에는 부처님인연이 좀더 지중한 모습으로 태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