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 한 병 때문에 종교를 바꾸겠다는 병사. ‘그깟 콜라 한 병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종교까지 바꿀까’하는 생각이 들어야 마땅한 일일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왜 그깟 콜라 한 병을 왜 못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 어머니는 농사일을 돕지 않고 절에나 다니는 아들이 몹시도 못마땅해 하셨다. 이런저런 이유로 절에 가는 것을 말리셨지만, 그런 부모님의 성화를 뒤로 하고 그렇게 열심히 다녔던 불교학생회. 콜라도 햄버거도 없었지만 참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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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호 중령은 종교를 바꾸겠다는 병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부족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콜라 한 병 때문에 종교를 바꾸겠다는 병사의 말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30년 가까이 군 포교 현장 속에서 살았지만 이렇게 비참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3년 전, 이 일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군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는 않았었다. 그냥 좋아서 해 온 일에 사명감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주위에서는 그런 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 중령은 그런 시선조차도 눈치 채지 못했다.
무엇인가에 미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것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용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열정과 용기로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그 열정과 용기 뒤에는 좌절도 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니까.
충북불교대학 교무처장 전철호(52) 법사가 30년 넘는 군 생활을 접고 중령으로 예편한 것은 2005년 1월. 1974년 3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예편할 때까지 군 포교 활동을 했으니 전 법사의 30년 군 생활은, 아니 전 법사의 삶은 ‘군 포교’ 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당한 체구에 깔끔한 인상.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무섭게 느껴질 만큼 눈빛이 날카롭다.
“아직도 군인이죠. 왜 있잖습니까, 밀어붙이는 거요.”
한 번 마음먹으면 밀어붙이는 성격은 군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타고 난 것 같다. 1975년 육군 3사관학교 생도시절, 생도불교동아리 ‘금강회’ 활동시간에 동기생들에게 불교기초예절을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고교시절 여섯 차례 불교 수련대회를 다녀온 것이 체험활동의 전부일 정도로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던 처지. 그런데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나온 것일까.
“열심히 공부해서 가르쳤죠. 가르쳤다기 보다는 함께 배웠다고 해야 맞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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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시작이었다. 대위로 8사단 오뚝이 부대에서 복무하던 시절에는 사병식당에서 사단의 군 법사를 초청해 일주일에 꼭 한 번씩 법회를 가졌다. 법당이 없어 식당에서 법회를 보았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즐거웠다.
소령이 돼서 6개월 간 육군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때는 불교동아리 총무를 맡았고, 21사단 ‘무적태풍부대’로 근무지를 옮기고 나서는 부대 창고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던 법당을 보수해 법회를 열고 장병들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한 달에 두 차례는 사병들을 데리고 동두천에 있는 사단사령부 법당에 가서 법회를 봤다.
1992년 중령으로 진급하고는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부대에 경기북부사암연합회의 후원을 받아 법당(호국대안사)을 건립했다. 장병들이 좋은 여건에서 법회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발원을 이룬 것이다. 이 법당에서도 전 중령은 직접 사병들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이듬해 경남 창녕 9군단 사령부로 자리를 옮겨서도 군 포교는 계속됐다. 형식에 그쳤던 사병들의 불교활동이 실질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군종병도 임명하고 해인사에서 후원을 받아 군법당도 마련했다.
YS 정권 시절인 1995년부터 97년까지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군무할 당시에는 유난히 훼불사건이 많았고 당시 국방장관이 이에 대해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국방장관의 사과를 이끌어내기까지 전 중령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강원도 원주 36사단 불교신도회장을 맡아 훈련병 수계법회를 열었으며, 홍천ㆍ태백ㆍ정선ㆍ영월ㆍ횡성ㆍ평창의 군부대와 지역 사찰들과 연계해 법회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지역 군부대들이 법사가 없어 법회를 열지 못하고 있었죠. 36사단에서 증평에 있는 37사단으로 왔는데, 이 지역도 마찬가지더군요. 그래서 진천 보은 옥천 청주의 군부대와 스님들을 연결시켜 법회를 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충북불교대학 사람들은 전철호 교무처장을 법사라고 부른다. 조계종 포교사이자, 포교사 고시 수험생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전 법사는 청주청원불교연합회 사무국장도 맡고 있고, 대전ㆍ충청 포교사단 군 포교 2팀 부팀장도 겸하고 있다.
“혼자 다해요, 전 법사 없으면 충북불교 쓰러질걸요….” 취재 내내 옆에서 서류정리를 하고 있던 충북불교대학 12기 학생회장 조보행(53) 거사가 한마디 거들자 옆에 있던 신도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구동성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전 법사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따로 있다. 바로 훈련병 수계법회다. 37사단에서 예편은 했지만 각 지역 사찰과 연계해 여전히 이곳 불자 훈련병들을 위한 수계법회를 열고 있다. 얼마 전 6월 25일에도 법주사에서 90여명의 훈련병 수계법회를 열었다. 올해 훈련병 수계법회로는 벌써 여섯 번째고, 연말까지 여섯 번이 더 계획돼 있다. 2001년부터 37사단 신도회장을 맡아 수계법회를 열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6년째고 지금까지 7천명의 훈련병이 계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전 중령인 것이다.
“작년에 충북지역에서 13명의 조계종 포교사가 배출됐습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죠. 올해는 30~50명이 시험에 응시할 계획인데, 모두 다 합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그래야 군 포교를 할 수 있는 인재가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든든한 후원자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아내 이경희(49) 보살과 미란(27)ㆍ혜수(25) 두 딸. 힘든 군 생활에서 불교에 귀의한 병사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전 법사는 이 모두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해준다고 했다.
오직 한 길, 군인은 평생 그 길을 묵묵히 걷는다. 전철호 법사, 아니 전철호 중령. 그는 누가 뭐래도 영원한 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