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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언할 수 없는 자기 보배의 맛을 알아야
현대불교신문연재 585호 길을 묻는 이에게
95년 6월 18일
여러분께서 비가 오는데도, 자리가 부족한데도 무릅쓰시고 이렇게 같이 동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몸을 벗기 전에 필연적으로 알아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생각이 때로는 착잡하기도 하지마는, 착잡한 거를 생각지 말라 해도 아니 되고 생각해라 해도 아니 되는 것이죠.

그건 왜냐하면은 길을 지나가다보면 벌레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동시에 그거를 감지해본다면, 기댈 데가 있으면 좀 덜하고 기댈 데가 없으면은 아주 역력히 자기 살 궁리를 합니다. 그런 거를 볼 때에 홀홀단신으로 모든 거를 집착하지 않고 일어선다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점을 감안해서 귀도 떠야 하고 눈도 밝아야 하고, 폭도 넓혀야 하고 하니까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머리 위에도 세계가 있고, 우리 발밑에도 세계가 있고, 사방팔방에 세계가 있습니다. 전체 ‘대천(大千)’하면 벌써 그렇게 있다는 말이고, ‘대천’ 하면 그런 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있다는 증겁니다.

그러니 요만한 한 지구의 우물에서 ‘우리가 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땐 참으로 답답한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답답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우물에서만이 자기 집이라고 하고, 자기 거라고 하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서로 뺏고 빼앗기고 하는 싸움을 계속하는 그런 정신계의 문제와 육신계의 물질세계와 이 모두가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새도 보십시오. 허허허. 전쟁 아닌가! 내가 생각할 때는 거저 줘도 싫다고 할 텐데 말입니다. 허허허. 돈을 갖다 주고 하라고 그래도 싫다고 할 텐데 말입니다. 이 문제들이 모두 겉면에 탐착을 해서 그런 거죠. 그것도 과한 욕심이죠. 진짜 욕심을 부리려면 우주세계 천차만별을 다 집어먹으려고 해야지 그것이 당연하겠죠. 영원치도 않은 걸 가지고 싸우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고등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하치않게 생을 버리다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세계가 그렇게 많고 그런데 여러분은 부처님께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신 말을 많이 들어보셨겠죠. 전기가 전력이 있으니까 이게 돌아가고 이렇게 불이 들어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데에서 연기법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 연기법이 있는 겁니다. 켜졌다는 것은 여러분이 다 분명히 아시죠. 그런데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거는 보지 못하시죠. 그것도 이름해서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연기법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연들이 다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분이 “스님, 지금 병원에서 죽어갑니다. 애를 낳고 하혈을 합니다.” 이렇게 해도 여러분은 보이지 않으니깐 모르시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응신(應身)으로 화(化)해서 거기까지 같이 해주십니다. 그런데 같이 해주는 것은 모르되 내가 하혈이 멎어진 것은 알거든, 응. 그러니 그것 또한 연기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연에 따라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연에 따라서 돌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될 겁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스위치만 누르면 즉발 전기가 들어오듯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방편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방편이 없어도 아니 되고 방편이 있어도 아니 되는 그 가운데 모두 여러분이 각자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아휴! 나를 찾으려니까 힘들고 주인공에다 놓을래도 잘 놔지지를 않고 그럽니다.” 그게 무슨 까닭이냐는 얘깁니다. 예를 들어서 콩씨를 심었는데 그 콩씨가 바로 싹으로 화해 버렸는데 콩씨를 과거로 돌아가서 찾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말씀 해드리는 게 맞습니까? 콩씨는 싹이 되려면, 인간이 정자 난자에 의해서 싹이 나듯이, 생산이 되듯이 그것도 수분과 흙과 그렇게 있어야 생산이 됩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생산이 됐으면, 싹이 나왔으면 태양열도 필요하고 거름도 필요하고 모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김 매주는 것도 필요하고. 그렇듯이 여러분이 콩싹이 콩씨를 찾을 때에는 반드시 그 콩싹에 콩씨가 또 열렸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콩씨는 과거 콩씨가 현실의 싹에 콩씨로 또 그렇게 연방 고리가 고리를 물고 있듯이 그렇게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콩이 콩싹으로 화했으니까 지나갔죠? 콩 시대는 지나갔단 말입니다. 이제 싹 시대죠. 싹 시대에서 싹에 콩씨가 또 붙었으니 자기 조상과 그 화한 싹과는 둘이 아니란 얘깁니다. 싹이 없어서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싹이 없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하느냐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싹과 콩과 둘이 아닐진대 어찌 싹이 콩을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또, 콩은 싹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서로 이끌고 있습니다. 누가 이끌어라 말아라 해서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묵은 뿌리가 있습니다. 콩 묵은 뿌리 말입니다! 콩싹이 육의 부모라고 한다면 콩씨는 법의 부모라고 할 수 있겠죠.

여러분이 넓혀야 할 것이 무엇인가? 넓히기만 하는 것이 부처님 법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넓게 알았으면 좁힐 줄도 알아야 한다. 좁힐 줄 안다면 넓힐 줄도 알아야 한다. 이 넓히고 좁히고 하는 생활의 작용을 어떻게 누구가 하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다 제각기 자기가 있으니깐 작용을 하죠? 자기가 없다면 누가 대신 해주겠습니까? 여러분은 불교를 믿으시면서 일하는 거 따로 불교 믿는 거 따로 계산들을 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둘이 아닌 까닭에, 전부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자기로 인해서 그 콩씨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바로 콩씨와 콩싹과 더불어 같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콩씨는 움죽거리지 않아도 그 능력은 배출할 수 있으니깐요. 그리고 또 콩싹에 배려할 수도 있구요. 그건 자동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작용 자체가 바로 자기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현실 그대로가 여여한 부처님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어떻게 지금 뛰고 생각하고 하는 세상에, 어떻게 멀리 가서 물어보고 와서 하겠습니까? 종교를 믿으면 어디에 귀의하고 무엇을 믿습니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것과 시시각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대치를 다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나 아닌 타의를 믿는다면 그냥 어떤 큰 일이 벌어졌을 때 길에 가다가도, 그럼 부처님한테 법당에 와서 물어봐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럼 벌써 일은 당하고 난 뒤에 부처님한테 와서 그 일을 그렇게 당했다고 할 겁니까? 아, 생각들 해보세요. 안 그런가, 그런가? 즉시 즉시 해결을 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되시라고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러한 방편의 이름이 있습니다. ‘와지끈 탕탕’이라고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거는 말로 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그럽니다마는, 왜 말로 할 수가 없느냐면 여러분이 그릇이 작으면 나도 작아지고 여러분이 커지면 나도 커지고 똑같이 그렇게 가거든요.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릇이 요만하면은 나도 요만할 수밖에 없지, 요만한 데다 드럼통으로 쓸어부어 봤자야. 다 나가버리고 그만인 거를 항상 똑같이 해드려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여여하게 두루 걸림 없이 찰나찰나 나투며 와지끈 탕탕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누구한테 물어야 합니까? 제 삼자가 대신해줄까요? 자기가, 자기 몸뚱이가 남한테 보였으니까, 그대로 자기가 있으니깐 닥쳐오는 겁니다, 그게. 자기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무효입니다. 그렇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성 원리가 있으니깐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콩씨를 자기 안에 두고, 남한테 만날 비럭질을 하는 거죠, 자기 보배를 자기 안에 두고도 말입니다. 그 보배란 어떤 것이냐? 불기둥과 같고 자기 몸뚱이는 수레와 같아요.

이 세상에 모든 차나 어떠한 물건이든지 중심 없이 바퀴가 돌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그 중심은 바로 심봉과 같고 자기 보배와 같아서 움죽거리질 않으면서도 그 능력을 베풀 수 있는, 배려해줄 수 있는 그것을 다 갖추고 있단 얘깁니다. 왜냐하면 심봉이기 때문에 바퀴가 거기 꿰어져 있거든요. 이 지구도 중심이 없다면 여여하게 그렇게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중심이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도 않고,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움죽거리게 돼 있습니다.

아까 연기법이라고 얘기했죠? 그것도 한 개의 이름이지 진실한 실천이 바로 문제입니다. 길에 오다 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보이지 않는 데서 대치를 할 수 있어야만이 보이는 데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남이 볼 때에 아, 저 사람은 모습은 저렇게 그냥 했어도 자기 몸이 수월하게 빠질 수 있고 여여하게 갈 수 있게끔 될 때 그걸 우연이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우연이라고 하겠느냐고요.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것도 대치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도 당했지, 그 우연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그 자기의 보배로 하여금 보이는 데로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하나의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우리가 지구 안에서 이렇게 오물딱오물딱 살면서, 벌레 하나 버리지 않고 살면서 그 바깥으로는 못 나가시죠? 지구 바깥으론 안 되시죠? 허허허. 그래서 말입니다. 항상 난 그런 말을 잘해요. 그 지구가 버스라면 대형 버스라면, 그 대형 버스 안에 우리가 들어서 서로 싸우고 그냥 수라장이 돼가지고 사는 겁니다.

‘이러냐, 이러냐? 옳으냐, 그르냐?’ 하고 온통 그냥 벌어먹기 위해서 안하무인으로 남을 밟고 남을 올라타고 또 올라타면 위에서 그냥 내리밀고 이렇게 해서 중간에서 그냥 힘이 들고, 살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래서 힘이 너무 들기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맸던 것입니다. 우리 중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안 맨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 살면서 이 버스가 돌아간다는 거는 알고 있는데, 어디로 돌아가고 돌아오는지 제자리걸음을 하는지 그걸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로 돌아서 오는지 어디로 돌아가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것도 또한 돌아가고 돌아온다는 거는 아는데 어디로 어떻게 해서 돌아오는 것은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도 또한 이름해서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죠?

사실은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냥 이름만 그렇게 돌아온다더라 그렇게 돌아간다더라 이런 것만 알지 내다보기라도 했습니까? 그래 여러분이 우물 안에서 놀기보다는 좀더 우주세계를 내다볼 수 있고, 우주세계를 들을 수 있고, 과거세계와 미래세계를 우리가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인생살이를 할까. 얼마나 자유인으로서 살 수 있을까. 밥을 굶는다 하더라도 허허, 하늘을 쳐다보고 웃을 수 있는 진짜 그런 자유인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도 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공양을 바치는 사람이 그냥 갖다줘도, 거지가 얻어다줘도, 어느 누구도 인연에 따라서 밥을 굶어서 배에서 쪼륵 소리 나게끔 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즉 자유인의 삶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오는 대로 배가 부르게 그냥 그저 자기 몸뚱이가 어떻게 되든지 먹기만 하는데 그게 아니죠. 자기가 공덕이 많아서, 베풀어줘서 그만큼 들어온다 하더라도 먹는 거를 또 제재해서 아주 알맞게 먹어야 되겠죠. 목적지를 가려면 알맞게 싣고 가야지 운전자 머리 위에도 그냥 잔뜩 싣는다면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듯이, 우리 삶이 바로 이런 것에서 모두 벌어지는 문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세상의 보물을 다 주워 모아서 너를 줄 테니 너 이걸 가지려느냐, 근본 금강석 같은 보배를 가지려느냐 한다면 어떤 거를 가지시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잘 살고 잘 먹고 부자로 으스대고 잘 살아보기 위해서는 아마 그거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거는 한철인 걸요, 한철요. 욕심 많은 사람은 한철 그까짓 거 가지고 눈에 뜨이지도 않습니다. 한철 지나면 그냥 다 없어질 것을, 자기 몸뚱이까지도 없어질 것을 왜 그걸 택하겠습니까? 그러니 영원히 내가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먹을 수 있고, 영원히 줄 수 있고, 영원히 갖출 수 있고, 영원히 자유스러울 수 있고 그런 길을 택하지, 고작 한철 잘 먹고 잘 지낼 거를 택하겠습니까?

지금 전세계로 다 돌아다녀보니까 전부 타의에서 구하고 기도를 해요. 정말 기도 소리라는 게, 너무도 기도라는 것에 실망을 해서요, 너무도 정말이지 기가 막힌 탄식이 나오더라구요. 때로는 영계성이다 때로는 뭐 그것들을 하나 붙들고 영계성의 연구를 하질 않나, 또 그렇지 않으면 철학이라고 하는 거를 붙들고 늘어지질 않나, 이것은 이것저것 하나만 붙들고 늘어지는 거야, 바깥으로 말이에요.

이 안의 내 보물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꿴 바로 기둥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은 기둥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그 수많은 세계를 다 대처하고 배려하고, 그 능력이 자동적으로 배출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 기둥이 하나 붙은 그 수레가 수억 개로, 수만억으로 돼 있고, 보살이 수십억으로 돼 있단 얘깁니다. 보살은 여러분의 마음을 두고 말하는 거죠. 그렇다면은 거기에는 철학도 붙어 있고, 의학도 붙어 있고, 과학도 붙어 있고, 천문학도 붙어 있고, 하하하. 이게 모두가 여기에 다 붙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를 모조리 요거 하나만 연구해서 내가 잘 캐치한다면 예를 들자면 콩껍데기가 콩이 자기한테 달려 있다는 거를 알면 진짜로 믿어질 겁니다. 자기 중심에 자기 몸뚱이가 있는 거지, 자기 몸뚱이가 없으면 중심도 없고, 중심이 없으면 몸뚱이도 없는 건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장마가 들었는데 개천을 건너려니까 어디를 뛰어야만 잘 건너뛸 수 있을까 하고 위도 보고 아래도 보지 않습니까? 그냥 무조건 뛰어가서 무조건 넓든지 좁든지, 빠질 거든지 안 빠질 거든지 그냥 뜁니까? 안 그러죠? 부처님께서는 그걸 말씀하신 겁니다. 상세계를 보고 하세계를 보고 중도(中道)를 지켜라, 중도를 지킴으로써 중용을 하게 된다, 중용을 하게 됨으로써 모두가 종자를 제대로 찾을 수 있고, 제대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느니라. 그러니까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거는 무조건 뛰어가서 건너질 말고, 아래 위를 봐서 잘 생각해서 내가 뛰어야 된다 하는 것을 안에다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굴려서, 안에다 굴리고 잘 보고 안에다 굴려서 뛰어라 이겁니다.

이 뛰는 것만 가지고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일체 만법 여러분이 굴리고 작용하고 돌아가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때에 따라서는 사람이 살다보면은 극한 문제가 있어서 안에다 굴리지 않는다면은 분기가 나서 분대로 막 말을 해버립니다. 말을 해버리면은 그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바퀴 굴리다 보면 “주인공! 너만이 그러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아!” 할 때에 벌써 마음은 가라앉아서 순서 없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때에 따라서는 아무렇게나 그냥 자기 생긴 대로 그냥 나오는 대로 막 말을 해버리는데 그렇게 한다면 안 됩니다. 항상 나를, 내 키에 재지 말고 내 그릇에 재지 말고 상대방의 그릇에 따라서 대치를 해나가신다면 얼마나 둥글고 좋겠습니까? 항상 잣대를 내 키에다 재면, 내 방식대로 내 그릇대로 상대방을 생각한다면 항상 모가 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그릇에 따라서 나도 그 그릇이 돼준다면 항상 둥근 겁니다, 둥글어요. 세상에 나서 얼마나 이 몸을 가지고 살려고 그렇게 남을 아프게 하고, 남을 섭섭하게 하고, 남을 이익치 못하게 하고, 앙심을 먹게 하고 그럽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나한테는 무슨 이득이 있느냐 하시겠지만 만물이 다 한마음이 돼서, 내 한마음이 돼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 내가 어떠한 데,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길에 가다가 몰매를 맞게 됐는데 그냥 내 한마음 식구가 모두 우르르르 달려 나옵니다. 그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모습이 없는 모습들이 달려 나오는 거죠. 달려와서 ‘아이쿠, 내 몸 죽인다.’ 하곤 내 몸 살리느라고 그냥 모두 살리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개운하고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이 자기 보배의 맛을 모르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안양엘 가다가 보니까 싸움이 났는데 무슨 싸움인가 하고 이렇게 내려다 봤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거지 탈을 쓴 아주 옷이 남루한 청년인데, 청년 다섯이 그냥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 돈이 없어서 못 준다는데도, “돈이 없어서 못 주지 있으면 주지 않겠니? 지금 우리 어머니가 병환이 나셔도 내가 그 돈을 못 주고 있지 않아.” 하는데도 그냥 “이 새끼 돈 내놔.” 하고는 그냥 때리거든요. 내가 내려다 보다가 아, 참 기가 막혀요. 세상 사는 게 저렇게 살고 저렇게 하다보면은 우리는 불국토를 가져오기는 커녕 악다구니 마구니 종자만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심스러워서 그거를 좀 내가 돼줬죠. 부처님이 되게끔, 부처님 법신(法身)이 되게끔 했단 얘깁니다.

그랬더니 어디서 난데없이 노인 축에도 안 가는 한 사십 먹은 분이 척 오더니 “왜들 이래? 돈이 없어서 못 주지 있으면 주지 않겠나? 누군들 다 그렇지, 너도 돈 없어봐라.” 하면서 그냥 탁 헤어지게 하니까 다 순순히 말을 듣구선 가더라구요. 가고 나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어, 그러게 그래. 어머니가 아파서 그거 그렇게 했어? 어디서 사는데?” 뭐 그런 걸 다 적어가지고 가더라구요. 틀림없이 취직을 시켰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하하하. (대중 박수)

이것이 우리가 그냥 우연이고 보통 그냥 아무렇지도 않는 일 같지만, 그 하나하나가 뼈저린 문제입니다. 인생이 살아나가는 데 얼마나 뼈저린 문제들이 다가오고 얼마나 뼈저린 문제들이 안에서 일어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고도 살아나가시면서도 그런 거를 당해보지 않은 분들은 말로만 듣고 그저 그런가보다 했지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기를 때 용돈 많이 주지 마시고, 허허허, 아주 모자라게도 주지 마시고 너무 넘치게도 주지 마세요. 그러고 겉으로 쓰다듬고 이쁘다고만 하지 마시고 속으로 항상, 그저 겉으로는 팽개쳐 놓는 거와 같아도 부드럽게 말해주고, 부드럽게 섬겨주긴 하지마는 항상 집착을 두지 마세요. 집착을 하면은 그건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의 큰 일을 못 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걸음을 걸어가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빛을 내지 못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가난한 집 아들은, 손도 써볼 수 없는 아들들은 그래도 스님께 말씀만 드리고 가면 다 좋은 데로 떨어졌는데, 뭐 그 미군들하고 이러는 거 뭐죠? 군인 가는 거 말이에요. 그런 데로들 떨어지고 병원으로 떨어지고 가까운 데로 떨어지고 이러는데, 부모들이 손을 써준 아들들은 다 잘 됐다 하더라도 다시 못돼졌고, 또 꺼내서 잘 해놨는데 일을 저지르고 자기가 스스로서 빛을 못 내고, 또 멀리 그냥 좋지 않은 데로 떨어지고 이렇게 됐다는 거를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스님, 세상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정말 그럽디다.” 하면서 “정말 그 도리를 가르쳐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고 울기까지 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당신이 그렇게 즐겁고 잘 믿고 가면 동시에 어디가 좋으냐 하면은 조상도 좋고 자녀들한테도 좋으니까 그 즐거운 눈물은 아껴두라고요. 그래서 이 도리를 꼭 믿고 가야 되고 실천해야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을 할 줄을 몰라서 지금 그러는데요. 이 조상이 잘해나갔으면 자식도 잘 돼나갑니다. 그런데 조상이 잘못했으면 자식도 거기 한 줄에 꿰어 있기 때문에 잘 안 됩니다, 그 업보가 같이같이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또 자식이 잘하면은 부모가 연결이 돼서, 조상들이 잘 천도가 되고 또 활용을 해서 이 세상에 보람 있게 나와서 참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을 이끌어가지마는, 그렇지 못하면 이런 게 있죠. 자식들이 잘못해 놓으면 부모가 회사 경영이라든가 정치라든가 이런 거 하는 데에 많이 연결되죠. 몹쓸 일을 했다면 아이고, 모가지까지도 날아갈 수가 있죠. 부모가 잘못해도 자식이 그렇고 자식이 잘못해도 부모가 그렇습니다.

이 도리에서 보면 대대로 그렇습니다, 대대로 말입니다. 그게 유전성입니다. 인과로 인해서 유전성이 되는 거죠. 그래서 유전성 세균성 업보성이 되는 거죠. 인과성 영계성, 이 문제가 어떻게 오느냐? 나는 현실에 정신분열증을 앓는 사람을 많이 볼 때 ‘어허, 저것은 아무 때 연분에 이렇게 이렇게 살생을 어떻게 어떻게 저질렀구나. 하나만이 아니라 수없는 거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식들마다 저렇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는 자기 자신과 식구들이 한데 합쳐서 지금 녹음이 되고 입력이 돼서 팔자 운명대로 나오는 것을 되 거기다가 넣어서 그 입력을 없애는 공부를 하시라 이겁니다. 그거는 그 자리에서 나온 자리로 다시 입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업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대대손손으로 내려갑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게. 영계성이든지 유전성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없애려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을, 되 그 자리에다가 맡겨놔야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질 거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는데도 모르시겠습니까? 아시겠죠?

대중: 예.(대중 웃음)

(다음 호에 계속)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6-06-28 오후 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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