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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이리 오소. 갑판에 나가봤자 뭐 하노. 춥기만 하지.” “여기까지 와서 왜 이래. 잘 봐두는 것이 최고야.”
손사래를 치며 부끄러워하는 할머니를 붙잡고 할아버지가 갑판으로 나갔다.
뱃전에 서서 탁 트인 하늘, 매끄럽게 넘실거리는 물살을 본 할머니는 이내 기분이 풀린 듯 할아버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유영배(71) 할머니는 “남편이 치매를 앓은 뒤로 외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함께 나온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김영복(75) 할아버지는 날짜에 혼동을 느끼는 듯 “예전에 화요일에도 왔었잖아”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부부가 함께 외출한 것은 벌써 수 년 전의 일이다. 그 동안은 할아버지의 치매를 수발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좀처럼 외출을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김영복, 유영배 부부 뿐만이 아니다. 어버이날 이틀 뒤인 지난 5월 10일, 평소 치매ㆍ중풍을 앓는 탓에 거동이 힘들어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성북구 지역 어르신 50여 명이 청와대를 관람한 뒤 한강 유람선을 타며 단 하루 동안의 특별한 외출을 만끽했다. 지역 복지관들의 조직적인 지원과 자원봉사자들의 살가운 보조가 없었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어르신들 위해서라면 종교 다른것 쯤이야
이번 행사는 성북구 내 치매ㆍ중풍 시설인 마하나임주간보호센터, 한마음의원과 진각복지재단 산하 성북노인종합복지관과 진각치매단기보호센터가 연합한 덕택에 이루어졌다.
대부분 누워서 지내야 하거나 거동이 가능해도 혼자 외출하기 힘든 치매·중풍 어르신을 위해 지역 복지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힘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이름 하여 ‘성북구 어르신 연합 프로젝트.’
한 달 전부터 각 단체별로 역할을 분담해 행사를 준비하고 후원금도 서로 보탰다. 모자란 예산을 쪼개고 쪼개 버스 3대도 빌렸다. 복지관들이 나서서 팔을 걷어붙이자 성북구 부녀회도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그간 각 단체의 ‘어르신 나들이’는 많았지만 성북구 내 복지관들이 연합해서 행사를 진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계 복지관인 마하나임주간보호센터와 불교계 복지관인 성북노인종합복지관, 진각치매단기보호센터가 종교를 초월해 손을 잡고 행사를 주관해 더욱 뜻 깊었다.
행사를 계획한 마하나임노인주간보호센터 이정민 원장은 “처음에는 (기독교와 불교라는) 기관 성격에 차이가 있어 연합 행사를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며 “하지만 어르신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개별 복지단체만 움직일 것이 아니라 지역적 복지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에 성북노인종합복지관 측에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성북노인종합복지관 윤동인 부장도 “복지단체의 종교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주민을 위한 복지가 가로막혀서야 되겠느냐”며 “종교와 종교가 서로 화합해 더 큰 복지의 장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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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나들이는 아침 10시 청와대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동안 바깥나들이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어르신들은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자 마냥 즐거워했다. 자원봉사자의 손과 휠체어에 의지해 청와대 관람을 시작한 어르신들은 약 1시간 가량영빈관과 춘추관, 상춘재를 둘러봤다.
김진도(75) 할아버지는 녹지원을 둘러보며 “좋다, 참 좋다”며 연신 웃었고 치매를 앓고 있는 곽정손(78) 할머니는 영빈관을 보고 짧게나마 기억이 되살아난 듯 “젊었을 때 TV에서 청와대를 봤어. 박 대통령이 사는 곳이지”라고 회상했다.
성북노인종합복지관 주간보호팀 김재범 사회복지사는 “어르신들이 자발적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고 치매 병세가 호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며 “노인성 치매를 앓아 단기 기억만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5월 10일이 청와대 가는 날이지?’라고 연신 물어보며 기억을 하는 등, 기대감으로 인해 자극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전했다.
몇몇 어르신은 행사 며칠 전부터 청와대를 구경하는 동안 지치지 않아야 한다며 조금씩 운동을 하기도 했다고. 단 하루뿐인 나들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르신들은 활력을 얻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셈이다.
이윽고 청와대 관람을 마친 어르신들은 여의도 유람선 선착장으로 장소를 옮겨 선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한강을 구경했다.
가슴 속에 희망의 등불 밝히고…
한강 유람선에 오른 어르신들은 소년 소녀처럼 활기를 띄었다. 서로 좋은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작은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점심식사를 하다가 멋진 풍경을 놓칠까봐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자원봉사자들의 부축을 받고 갑판에 올라 연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어르신들이 닫아뒀던 마음의 문도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한희순(70) 할머니가 언제부터인가 자원봉사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쁘다, 참 착하다”라고 연신 말하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의 손을 빌어 움직이는 것이 달갑지 않아서 일부러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는데, 봉사자가 말없이 할머니의 밥 수발까지 정성스럽게 도와주자 감동한 것이다.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흥에 겨운 나머지 ‘찔레꽃’까지 부르며 즐거운 뱃놀이를 마친 어르신들은 이윽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앞으로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기회가 또 얼마 만에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어르신들의 가슴 속에는 희망이라는 밝은 등불이 하나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