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무술의 산 역사로 불리던 청호당 양익 스님이 5월 6일 범어사 청련암에서 입적하면서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 금강승불무도, 선관무, 선무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
‘무술’로뿐 아니라 불교 수행법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는 불교금강영관은 마음공부와 함께 이를 위한 신체 수련까지 가능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불자는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 각광 받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하고 있다.
경주 골굴사의 경우 선무도 템플스테이의 대표 도량으로서 수련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양익 스님의 발자취와 함께 국내외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금강영관’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본다.
수행적 실천법 ‘깨달음’ 지향
양익 스님이 체계를 잡은 불교무도는 정확히 ‘불교금강영관’이라고 해야 한다. 현재 선무도, 금강승불무도, 선관무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모두 대중화를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불교금강영관’은 부처님으로부터 2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승가의 전통적인 수행법으로 몸과 마음과 호홉의 조화로 작게는 심신의 평화로운 안정과 크게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적 수행법이다.
신라의 원광법사나 원효대사는 신라화랑들의 신심수련과 호국 무술로 세속에 전파했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호국무술로 정착돼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금강승들을 중심으로 비전돼 왔다. 조선시대 승병을 이끌었던 스님들도 불교무도의 명인들이었다고 전해지나 일제 강점기를 맞으며 맥이 끊긴 것을 1950년대 양익 스님이 많은 부분을 발굴, 복원, 체계화시킨 것이다.
수련법은 정적 수련을 위주로 하는 영정관법(靈靜觀法), 선체조, 선요가에 해당되는 영중관법(靈中觀法), 동적인 수련에 해당되는 영동관법(靈動觀法)으로 나눠진다. 다시 세부적으로 입관(立觀), 좌관(坐觀), 행관(行觀)으로 영정입관과 영동입관, 영정좌관과 영동좌관, 영정행관과 영동행관으로 나뉘는 것이다.
모든 수련에서 몸과 마음, 호흡의 일치를 중요시 하며 선체조와 팔, 다리, 머리, 배, 등판 등의 다섯 부위를 부드럽게 한다고 하여 오체유법이라 통하는 선요가 등의 기본 수련이 바탕이 돼야 영정관법이나 영동관법을 수련할 수 있다.
특히 영정행관은 10개의 동작으로 이뤄져 영동행관의 승형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행(行), 주(住), 좌(座 ), 와(臥), 어(語), 묵(默), 동(動), 정(靜), 반(返), 공(空)의 10개 동작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몸 전체에 안정과 활력을 주는 동작이다.
또 영동행관은 일반무예의 형, 즉 품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1승형에서 10승형까지 있다. 다른 무술의 경우, 초단의 수련 경력을 가진 사람이 6단의 품세를 흉내 낼 수 있는 것과 달리 1승형을 수련한 사람이라도 2승형이나 3승형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만큼 호흡을 통한 내공이 연마돼야 하는 수련법인 셈이다. 이어 10승형 다음 단계로 1지에서 10지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수련내용을 좌관, 입관, 행관의 밀교적 관법수행에 비추어 보면 불교금강영관의 동작이 거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무도의 수련내용 중 앉아서 하는 좌관법만 보더라도 가부좌를 취하고 깊은 호흡의 조화와 더불어 여러 형태의 수인을 연결해 움직여 심리적인 상태를 조작함으로써 삼매에 들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금강영관은 철저하게 수행적 실천법으로서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다.
원욱·적운·안도 스님 등 보급 앞장
불교금강영관의 대중화에는 서울 호압사의 원욱 스님과 적운 스님, 안도 스님이 앞장서고 있다.
원욱 스님(호압사 주지)은 선관무가 무술이 아닌 수행법임을 강조하며, 서울 방배동의 중앙총본원과 성남의 경기본원, 전주의 전북본원을 축으로 선관무 수행법을 보급하고 있다.
특히 선관무는 서울과 고양 등지의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에도 보급돼 있으며, 이스라엘에도 분원이 마련돼 한국불교를 알리고 있다. 중국과 미국에도 선관무 동아리가 운영되고 있다.
7년간 양익 스님에게 사사 받은 적운 스님은 1985년 불교금강영관을 ‘참선과 무도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선무도’로 칭하며 대중화에 나섰다. 이후 선무도 총본산인 경주 골굴사를 중심으로 서울, 안산, 부산, 양산 등 국내 8개 지원과 미국 플로리다 지원, 캐나다 토론토 지원, 호주 살즈버그 지원, 프랑스 토루스 지원 등 해외 4개 지원에서 선무도를 보급, 홍보하고 있다.
세계금강승불무도협회 총재인 안도 스님도 부산 금강선원을 중심으로 부산 시내, 양산, 기장 등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부산경상대학교 경찰행정과 무술 교수로 활동하며 저변확대에 나서고 있다.
범어사에서는 불무도 템플스테이를 열어 청소년, 일반인 등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단법인 세계선무도협회 정현표 회장은 “몸과 마음과 호흡의 조화로 심신의 안정과 깨달음을 향한 구도 수행법인 선무도는 정신건강이 화두가 된 웰빙시대에 적합하다”며 “불자뿐만 아니라 개신교, 가톨릭 신자 선무도 인구도 약 200여명에 달하고 있는 등 ‘국민무예’로 발돋움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양익 스님은 누구
양익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물론 무술인들에게도 ‘전설’같은 존재다. 이는 일생을 통해 ‘불교금강영관’이라는 수행법을 체계화하고 전수해온 스님의 삶이 수행자로서뿐 아니라 무도인으로도 대중의 지표가 돼 왔다는 방증이다.
1962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부산 범어사에서 입산출가한 양익 스님은 <법화경>과 <화엄경>을 토대로 몸과 마음을 실천적으로 수행해 번뇌를 여의토록 하는 불교금강영관의 체계를 정립하고 출·재가 제자들에게 전수해 왔다.
‘금강영관’ ‘신심일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제자들에게 일렀던 양익 스님은 몸의 극한에서 정신적인 초월을 이끌어내는 수행법으로서 불교금강영관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양익 스님은 검술, 창술을 배제하고 공격이나 방어의 목적이 아닌 심신의 조화로운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법으로서 틀을 잡았다.
양익 스님은 갖가지 일화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37세이던 1971년에는 함께 공부하던 도반 스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 높이 4m에 이르는 범어사 일주문을 뛰어 넘었다거나, 스님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청련암까지 찾아온 검도 고수를 나뭇가지 하나로 제압했다는 등의 ‘전설’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쌍계사 조실 고산 스님은 양익 스님이 결과부좌한 채로 공중부양하여 천장의 못을 빼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익 스님은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히 싫어해 제자들이 일반에게 불교금강영관을 보급하는 것을 반대하다 나중에는 수행법으로서 내실 있게 가르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양익 스님을 은사로 12년간 선무도를 수련한 안도 스님은 “지난해 범어사 개산대재에서 금강승불무도를 선보였다는 이유로 몽둥이를 맞았다”며 “수행자답게 겸손하지 못하고 섣부른 잡기를 대중 앞에 선보인다는 게 몽둥이의 이유였는데 그때 매를 든 스승에게서 제자를 아끼는 자비심을 절실히 느꼈다”고 회고했다.
양익 스님은 원적 직전까지도 홍천의 불사와, 은사인 동산 스님 생가복원 불사에 매진했다. 입적 하루 전인 5월 5일, 상좌 약연 스님을 불러 불사를 맡기겠다고 전하고 오후에 통도사 적멸보궁을 참배한 후 다음날 새벽 가부좌한 채 고요히 입적에 들었다. 다비식은 5월 10일 범어사 다비장에서 엄수됐다.
# 우리나라 금강영관 계보
양익 스님은 1971년 불교금강영관 관주로서 범어사 극락암 서지전에 대금강승문을 열어 선무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범어사 청련암 주지를 맡아 불교금강영관 연수원을 개관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정경 스님을 비롯한 고봉, 의정, 정산, 대일, 법찬, 안도, 광원 스님 등 28명의 은법 상좌를 두었는데 은법 상좌들도 불교금강영관 수련이 생활화돼 있다. 또한 원욱, 인걸, 지연, 적운, 원명, 각현 스님 등 19명은 연수원에서 무도를 지도하며 법상좌의 인연을 맺었다. 이 밖에도 박정현 범어사 신도회장을 비롯 수 백 명에 달하는 재가자들도 제자로 길러내며 불교수행법으로서의 금강영관 대중화에 불씨를 지폈다. 국내외로 90여 곳에서 스님에게 무도를 배웠던 제자들이 불교금강영관을 통해 불법을 펴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 호압사 원욱 스님의 관선무, 경주 골굴사 적운 스님의 선무도, 부산 금강선원 안도 스님의 금강승불무도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도 스님은“ 불교금강영관을 배운 제자들이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며 계보가 달라지고 있지만 각각의 계보마다 이렇다 할 특징이나 큰 차이점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모두 양익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법으로 정착시켜 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