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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법전 종정스님의 하안거 결제법어 전문.
진정한 말후일구(末後一句)는 무엇인가
덕산 스님이 어느 날 공양이 늦어지자 손수 발우를 들고서 법당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공양주 소임을 살고 있던 설봉 스님은 이 광경을 보고서 말했습니다.
“저 늙은이가 종도 치지 않고 북도 두드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덕산 스님은 머리를 푹 숙이고서 곧장 방장실로 되돌아갔습니다.
설봉스님과 함께 살던 암두 스님은 이 일을 전해 듣고서 또 한마디를 보태는 것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덕산이 말후구(末後句)도 모르는구나.”
그러자 덕산 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암두 스님을 불러 물었습니다.
“그대가 노승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그러자 암두 스님은 은밀히 자신의 뜻을 덕산 스님에게 열어 보였습니다.
이튿날 덕산 스님은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는데 그 전의 법문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러자 암두가 큰방 앞에서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 노장이 이제 겨우 말후구를 알게 되었구나. 이 이후로는 천하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다만 삼년뿐이로다.”
덕산탁발(德山托鉢) 공안에는 4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덕산 선사가 제자 설봉 스님의 말 한 마디에 고개를 푹 숙이고 방장실로 되돌아간 부분입니다.
정말로 대답할 능력이 없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까?
둘째, 덕산 선사가 과연 말후구를 몰랐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말후구를 모르고서 어떻게 당대의 대선지식이 될 수 있었던가 하는 의문입니다.
셋째, 암두 스님이 은밀히 자신의 견처를 내보였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입니까?
넷째, 덕산 스님이 암두 스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말후구를 알았다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제자인 암두 스님이 스승인 덕산 스님보다 안목이 더 나았다는 것입니까?
따라서 이 공안은 이렇게 말하거나 저렇게 말하거나 무슨 말을 하건 상관없이 독약과 같아서 상신실명(喪身失命)하게 될 것이니 부질없는 알음알이로 소견을 달아 조사의 참뜻을 묻어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량 분별인 유심(有心)경계는 고사하고 허통공적(虛通空寂)한 무심(無心)의 깊은 곳에서도 그 참뜻을 알아차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직 최후의 굳센 관문을 쳐부수고 확철히 크게 깨쳐야만 비로소 고인의 입각처(立脚處)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공안을 제대로 바로 알기만 한다면 모든 부처님과 조사의 일체공안을 일시에 다 타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출격장부가 되어 금강보검을 높이 들고서 천하를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살활자재(殺活自在)할 것이니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결제대중들이여!
산승의 견처로 점검해보니 최초의 일구를 안다면 최후의 일구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최후의 일구나 최초의 일구 모두 궁극적인 일구 즉 말후구는 아닙니다.
이들 공안을 제방에서 흔히들 여러 가지로 논해왔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선 일체 묻지 않겠습니다.
덕산 삼부자가 주고받은 문제의 그 말후구가 과연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참으로 그 말후구(末後句)인가 하는 것을 이번 하안거 결제 한철동안 잘 참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작각월중계(斫却月中桂)하니
청광전갱다(淸光轉更多)로다
호리구병적(狐狸俱屛迹)하고
사자분금모(獅子奮金毛)로다
달 속의 계수나무 베어내니
밝은 빛이 더욱 많아짐이로다.
여우와 살쾡이는 자취를 감추고
사자는 황금털을 뽐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