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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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진짜 믿어야
현대불교신문 연재-576호 길을 묻는 이에게
이렇게 정신계의 공부를 하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을 보니 너무나 감개무량합니다. 필연적으로 해야 할 문제이지만 모두 딴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아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혼자 못 산다는 건 여러분이 더 잘 아시죠? 모두가 인연에 따라서 그것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고, 발전도 하고 창조도 하고, 창조력을 기르기도 하고 이렇게 나가죠. 내가 왜 꼬집어서 이런 말만 하느냐 하면, 최초의 근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고받고 주고받고 돌아가는 것이 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는 여러분 각자가 없었다면 무효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있기 때문에 인연 소치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돌아가는 그 자체를 바로 진리라고 하죠. 그 진리가 끝간 데 없이 ‘나’로 인해서 돌아갑니다. 여러분 각자로 인해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느니라.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 있는고?” 하고 물으셨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 있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마음에 있다고 하시겠죠?

그런데 그것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 인해서 여러 분야로 발전도 할 수 있고…, 이 생활이 그대로 과학입니다. 그리고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입니다. 우주의 근본으로부터 그 모든 것을 끌어내려서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하여튼, 우리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법의 근원은 어디 있느냐?” “내 마음에 있다.” “어떤 것이 참선인가?” “생활 참선!” 여러 마디 거론되는 말을 쑥 빼고 지금 얘깁니다. 그 근원이 어디 있는가? 근원에서 들이고 내는 생활 속에서 ‘나의 주인공(主人空)이다.’ 할 때 주인(主人)은 여러분의 중심입니다. 공(空)은 여러분이 활용할 때에 돌아가는 그 자체입니다. 찰나찰나로 변해서 돌아가는 거요. 그렇기 때문에 ‘주인, 공’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되놓아라. 되놓고 침착하게 관찰하라.’ 합니다. 그냥 일하면서도, 앉아 있으면서도, 서 있으면서도, 누워 있으면서도 무엇을 하든지 참선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안되는 것을 ‘이것이 슬기롭게 돌아가게 하는 것도 여기다.’하고 놨을 때에 그게 돌려놓는 겁니다. 됐을 땐 감사하게 놓고, 그리고 진짜 나를, 진실한 나를 구할 때는 ‘참나가 있다는 증명도 거기서만이 해 줄 수 있다.’ 하고 놓고 관(觀)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놓을 때 바로 ‘관해 본다’ 그러죠? 그것을 ‘관찰’이라고 합시다. 관찰! 그러고서 또 실험하면서 체험하면서, 진짜로 무조건 믿고 물러서지 않는 도리에 놓고, 그렇게 체험하고 돌아가는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즉, 관찰하면서 지켜보면서 실험하면서 체험하고, 진짜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큰 것에서부터 조그만 것까지 내 앞에 용도에 따라 닥치는 대로 놓고 관찰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고 무조건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게 뭣고?’ 하고 열네 날 있어도 뭐는 뭡니까? 그냥 뭐지!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전에 선지식들께서 표현하시기를 “수박을 놓고 이게 뭐냐고 아무리 돌려 가면서 봐도 맛은 알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내가 실험을 통해서 관찰하고 내가 체험을 해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참선입니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하나 행하는 것을 좌선ㆍ입선ㆍ와선ㆍ행선이라고 합니다. 그 네 가지가 다 한꺼번에 돌아가는 것이 바로 생활입니다. 그래서 생활 참선이라고 합니다. 생활이 그대로 참선이자, 이 세상 돌아가는 일체 만물만생이 다 공안(公案)이 될 수 있고, 만물만생이 살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도량이 될 수 있고, 내 앉은 자리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어디로 찾아다닌다, 또는 모르는 게 있으면 경전을 들춰 본다고 해서 그 진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든 알든, 못났든 잘났든 내가 길을 가다가 엎드러졌으면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죠. 땅을 짚고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다리 절름발이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거죠, 정상적인 사람이. 우리는 50% 무(無)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절름발입니다. 그래서 다리 한 짝을 마저 일으켜 세우는 도리를 공부하는 겁니다, 지금. 그리고 눈은 애꾸입니다. 눈 한 짝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한 짝을 마저 뜨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겁니다, 지금. 그러니까 이 마음자리에서만이 일체 만법이 나고 들고 나고 들고 하는 거니까. 그것을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체험을 안 한다면 그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 몸으로나 가정으로나, 모든 것을 습득을 해서 모든 관습을 놓고 실험을 하는 겁니다, 하나하나. 알고 보면 상당히 쉬운 일인데도 자기를 자기가 못 믿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믿고 뭘 그렇게 알아야 하고 따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잘 배웠고 잘났고, 똑똑하고 못났고, 못하고 못 배웠고 이런 거를 몽땅 다 놓는 겁니다. 놓는 거라고 하니까 놓는 거에 또 걸리지 마십시오. 내 육체를 나라고 하거나, 내가 했다고 하거나, 내가 가졌다고 하거나, 모든 걸 나라고 일으켜 세운다면 모두 둘로 보이기 때문에, 상대로 보이기 때문에 잘했다 못했다가 연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겁니다. 그리고 업이 녹질 않아요. 과거에 입력된 것이 살살 나오는 위에다 또 자꾸 업을 지어서 미래에 나오게끔 입력하는 겁니다. 지금 입력되는 거는 미래에 가지고 나올 것을 미리 저장을 하는 거죠. 저장 아닌 저장이죠. 여러분이 그 업을 안 지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이건 자동적으로 되는 거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여러분이 각자 자신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육을 끌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래, 내 신을 두고 남의 신을 찾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자신(自神)을 두고! 자신은 정신계에 속하고, 육은 현실계에 속하는 겁니다. 항상 육은 끌려다닙니다, 마음의 주인한테. 그러니 잘못 돌아가는 거는 거기다 되놓고 잘 돌아가게 해서 서로가, 누가 더 높고 얕음이 없이 상통하면서 같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는 같이 작용을 하는데, 지금 유심(有心)에서는 도저히 정신계와 물질계가 한데 작용을 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걸 새삼스럽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현재 그렇게 가고 있으니 그걸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뭣고? 이렇게 되는 거지, 저렇게 되는 거지! 이게 틀리지, 이게 옳지!’ 이런다면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믿고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이끌어 갑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따져야 하는 마음이 생기십니까?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는 겁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죠. 그러니 ‘이렇게 해야 맞지, 저렇게 해야 맞지!’ 하고 자꾸 잔소리가 심하고 이론이 많아지고 그런다면 전자와 전자가 어떻게 마주 붙어서 불이 들어옵니까? 네?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려고 드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좀 심사숙고해서 여러분은 진짜로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믿고, 자기 주먹만을 믿고 주먹에서 나오는 거 주먹에다가 도로 놓는 마음! 이 세상을 다 지닌 한자리, 그 주먹 아닙니까? 허허허….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먼저, 매월 첫째 일요일마다 바쁘신 중에도 저희 법형제를 위해서 이렇게 시간을 내 주시고 좋은 법문을 해 주시는 큰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제가 질문을 여쭈고자 합니다. 이 지구상에 마음공부 하시는 분이 또 있으리라고 전제하고 여쭤 보겠습니다. 가령 인도에도 계시고 일본에도 계시고 중동에도 계시고 한국에도 계시다고 할 때, 세계적인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면 그분들은 다 함께 그 일을 하시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작년 봄에 걸프전이나 엊그제의 L.A.폭동 사건 등을 뉴스를 통해서 전 세계인이 동시에 보게 됩니다. 따라서 ‘저러면 안 되는데….’ 하고 동시에 마음을 낼 것이고 특히 깨달으신 분들은 더욱이나 빨리 평화로운 상태가 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분들이 마음을 내셨기에 더 크게 일이 번질 것이 그쯤에서 끝난 것인지, 그렇게 보아도 되는 것인지, 또 인연도리로써 마음을 내시지 않고 그냥 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일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큰스님: 아이구, 질문이 장창이군요, 아주. 하하하…. 그러나 잘 물으셨습니다. 이거는 ‘마음을 낸다, 안 낸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내가 항상 이렇게 말했죠? 우주와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다고요. 우리 각자 개개인이 자가발전소라면, 종합된 발전소가 있습니다. 이거를 바로 불바퀴라고 합니다. 법바퀴라고도 하죠. 그럼 또 이런 말을 한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깨달은 분이 수가 없이 많다 하더라도 한 불바퀴입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돼 있어요. 낱낱의 물방울이 (물을 컵 뚜껑에 조금 부어 보이시며) 수천수만이라고 하더라도 물방울이 여기 다 들어가면 한 그릇입니다. (뚜껑에 있는 물을 컵에 다시 부으시며) 한 그릇! 진리라는 게 자동적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벌써 이런 일이 생겨서 퍼뜩 알았다 할 때, 모두 불바퀴에 본래 직결이 돼 있으니까 한 찰나에 통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사람이 마음을 내면 스위치가 올려지는 격입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면 거기에서 한 찰나에 회의가 벌어지는 거와 다름없습니다. 이것도 자동적입니다. 회의가 벌어졌다가 그 모든 응신(應身)들이 거기에서부터 다, 가설이 된 대로 그냥 자동적으로 전력이 나오듯이 이렇게…. 이거 이해가 갑니까?

▲질문자1(남): 말씀하시는 의도는 짐작이 갑니다.

▲큰스님: 짐작이 가라고 하는 건데 그럼, 허허허…. 발전소에서 발전소로 하달이 돼 가지고, 그때는 그냥 그대로 전력을 뽑아 쓰는 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또 마음을 낸다, 안 낸다 할 것도 없죠. 보고 들었으면 그대로 감지가 돼서 그대로 그냥, 그대로 자동적으로 가는 사이 없이 오르고 내려서 오른다 내린다 하는 언어도 붙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를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직결이 돼 있는 것도 모르고, 가설이 돼 있는 것도 모르죠. 위로는 직결이 돼 있고 아래로는 가설이 돼 있으니까 그냥 자기의 그 한자리에, 가설이 돼 있는 자리에 놓았으면 될 텐데, 그 가운데 스위치만 올리면 될 거를, 그거를 몰라서 자기한테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있다, 없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텔레비전에서나 뭐 이런 데서 방송이 되면, 할 것은 하고 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딱 한데 놓고 한생각 하면 컴퓨터에 그것이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가지고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한생각만 넣으면 그냥 그냥 자동적으로 나오듯이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항상 하는 말입니다. 모든 거를 용광로에 넣는 작업만 한다면 생산돼 나가는 것은 자동적으로 생산이 돼 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거기다 놔라 이런 말입니다. 이런 뜻도 다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뿐만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 하면 벌써 태양계로 은하계로 다 통하게 돼 있고 그것은 뭐…. 그래서 대천세계, 소천세계가 한데 합쳐져서 중천세계입니다, 우리 사는 데가. 이러니 모두가 종합돼서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 어디에 깨달은 사람이 많이 있어서 같이 마음을 내 주는지 어쩌는지 하는데, 같이 마음을 내다 보면 그것이 어떻게 찰나가 됩니까? 그리고 같이 어떻게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까? 인간이 마음 내는 것은 사량적입니다. 인간 이전에 ‘참’, ‘참 진(眞)’이 거기 한데 모여서, 직결되고 가설이 돼서 모두 그렇게 마련이 돼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대로 한 불바퀴에 모든 것이 직결돼 있기 때문에 딱 스위치만 올리면 거기에서 응신들이 출발을 해서 이 사바세계의 어떠한 문제가 있을 때, 즉 말하자면 그 나쁜 마음속에 전부 응신이 돼서 들어갑니다. 응신이 돼서 들어갔다가 한 찰나에 나시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들이 다 바꾸어집니다. 그러니까 몸, 활동도 바꾸어지죠, 마음이 바꾸어지니까.

여러분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그 중생들이, 만약에 이런 공부를 각자 하신다면 천백억의 화신(化身)으로 화(化)한단 말입니다. 그 중생들이, 업식이 그냥 화해서 화신이 돼 버려요. 화한다고 그래서 ‘화신’인 겁니다, 바꿔진다고 해서. 그런데 또 상대방한테 들어가서…, 돼지가 만약에 응해 달라고 하면 돼지한테로 들어가야죠? 돼지가 돼 줘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응신이라고 합니다. 법신(法身), 응신(應身), 보신(報身) 이럽니다. 그것은 한 찰나에 들고 나기 때문에, 예를 들어 미국에서 “스님! 이러이러합니다. 지금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또 중국에서 “어이구, 이거 피가 멈추질 않아서 오질 못합니다.” 그럴 땐 응신이 아니고는 아니 되죠. 가고 옴이 없이 한 찰나에 들어야죠? 한 찰나가 아니라면 그거는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응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을 건지는 데는, 돼지가 사람을 보면 둘로 보지만 돼지가 돼지를 볼 때는 하나로 봅니다. 그래서 저항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돼지뿐이 아닙니다. 꽃이나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짐승들이나 나는 짐승들이나 또 곤충이나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접근을 하면 의심을 하고 돌아가죠? 아는 사람이라면 아주 제깍 접근이 되죠.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으로 변신을 해서 접견하는 거죠. 이것이 바로 화신이자 응신입니다. 그와 같이 그 모든 일은 그렇게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직결돼 있는 데는 모든 자가발전소가 한데 합쳐진 자가발전소요, 지금 가설이 된 데는 현재 세상이란 말입니다.

▲질문자1(남): 두 번째 질문 드리겠습니다. 항시 둘 아닌 도리를 되새기고자 애쓰면서 무언의 대화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특히 ‘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면 그것도 내 속에서 나온 습인 줄 알고 슬며시 놓아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만, 어떤 때는 격한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자신도 모르게 저 잘난 소리를 마구 늘어놓다가 한순간에 나도 모르게 ‘아이쿠!’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스님께서는 늘 되입력하는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만 이렇게 먼저 입력된 것이 잘 지워지지 않는 경우는, 말하자면 습이 워낙 중한 까닭인지요? 아니면 되입력하는 마음의 힘이 약한 때문인지요? 놓고 또 놓는다고 하면서 되나오고 되나오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그건 입력이 안 됐기 때문에 되나오고 그렇죠. 그것이 말입니다, 자기한테 자기가 자꾸 따지는 버릇을 갖는다면 습입니다, 그게. 자기한테만 따지는 게 아니라 상대방한테도 따지죠, 일일이. 그게 왜냐하면요,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몸속에 자기가 다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속에 전부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는데 거기서 솔솔, 그저 이때 한 거는 이때 나오고 저때 한 거는 저때 나오고, 그냥 입력된 대로 순서대로 착착 나옵니다. 이거 거짓말 아닙니다. 착착 나오는데 그 나오는 의식들이 수가 없습니다. 그 의식들이 입력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꾸자꾸 거기서 나오는 대로 나오는 그것만 알지, 그것이 잘되고 잘못되는 거를 모르는 중생들입니다. 이게 업식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대로, 그놈도 거기서 나온 거, 그놈도 거기서 나온 거, 그놈도 거기서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어느 수좌가 동짓날 팥죽을 큰 솥에다 쑤는데 팥죽이 부글부글 끓어서 팥죽 방울이 수없이 나오거든요. 수없이 나오니까 퍼뜩 그 생각을 한 겁니다. ‘아, 우리 몸뚱이 속에 있는 팥죽 방울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그러니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되겠구나. 방울대로 따로따로 있는 줄 알고 했는데 아이구, 한 팥죽 솥에서 나오는구나!’ 하고요. 이제 아시겠죠? 한 팥죽 솥에서 방울이 나오는 거지 팥죽 솥이 따로 있어서 방울이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자기 법이란 얘기죠. 법신! “요것도 법신! 요것도 법신!” 하고는 주걱으로 때렸단 말입니다. “이것도 문수! 저것도 문수!” 하고 그저 때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가 스스로 익는다면 벌써 팥죽은 다 익었으니까, 열기가 더 오르지도 않고 더 내리지도 않고 아주 평상시처럼 따뜻하게만 하고 가거든요. 그러니까 팥죽 방울이 올라오지 않죠. 모두가 하나가 돼 버렸으니까, 그냥 모두가 팥죽이 돼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듯이 모든 것을, 거기서 어떠한 뿔따구가 나오든지, 또 자기에게 누가 되게끔 생각이 나오든지, 또 집안 식구들한테 짜증이 나든지, 또 자식이 잘못해서 속이 상하든지, 모든 것을 거기다가 그냥…, 그것도 거기서 나오는 것, 그것도 거기서 나오는 것, 자식의 일이든지 뭐든지 다 거기다가 맡겨 놓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나오는 걸 거기다가 맡겨 놓을 때, 동시에 ‘흥, 이렇게 나오는 거라면 돌아서 잘 나오게도 할 수 있잖아!’ 하는 생각이 아주 필연적으로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안 되는 일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면, 되게 할 수 있는 일도 거기서 나올 수 있잖아?’ 하고 돌려 놓는 겁니다.

속에서 이렇게 뿔따구가 날 때 ‘아니, 불이 일어나게끔 나올 때 불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도 바로 거기 아닌가?’ 이럴 때는 아주 선선하게 이 마음이 곧바로 화해 가지고는 아주 좋게 나옵니다. 즐겁게 나옵니다. 웃음도 깔깔대고 웃다가 ‘아이고, 이거 안됐잖아?’ 하는 생각을 하면 웃음이 뚝 멎죠? 허허허…. 그렇게만 하신다면 모든 게 아주 더함도 덜함도 없는 잘 익은 팥죽이 돼서 맛있게 맛을 볼 것입니다.

▲질문자1(남): 고맙습니다. 여기 모이신 법형제들의 가슴에 그 좋은 말씀 하나하나가 전부 약이 되고 덕이 되고 모든 공부하는 데….

▲큰스님: 그냥, 공덕이라고만 하세요. 허허허….

▲질문자1(남): 예, 공덕이 돼 가지고 모든 공부하는 데 도움이 크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질문자2(남): 정말 이 세상에 마(魔)가 있는지 그걸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이거 봐요. 악과 선이 어찌 없겠소? 동시에 모두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란 놈이 도둑질도 시키고 좋은 일도 시키죠. 그러니 좋은 일 하는 사람이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니고 악한 짓 하는 사람이 악한 짓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나타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찰나찰나 화해서, 착하던 사람도 앞에 딱 닥치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되고, 또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딱 닥치면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좋은 일 하는 사람, 나쁜 일 하는 사람, 이것을 참선에서는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니까 말입니다. 어떤 것을 나쁘다고 하고 어떤 것을 좋다고 하겠느냐. 마음을 바로 쓸 때는 이렇게 되고, 또 나쁜 상황이 앞에 딱 닥치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옛날에 한 강도가 어느 수풀 속을 지나가는데 어느 여인이 어린애를 안고 업고 걸리면서 “엉엉” 울고 가더랍니다. 밥도 못 먹였는지 “엄마, 밥 줘! 밥 줘!” 하고 울고 가는데, 참혹해서 볼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강도가 아닌 척 하고선 “어린애가 배고프다 그러는데 먹을 게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먹을 것도 없거니와 남편도 붙잡혀 가서 영 오지 않고, 그렇게 되니까 집도 오막살이 있던 것을 뺏기고 어디로 갈 데도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돈을 뺏어서 전대를 해 가지고 있던 것과 먹을 것을 좀 훔쳐 뒀던 것을, 전대 돈은 가서 오막살이라도 하나 장만해서 먹고 살라고 주고, 자기 먹으려고 집어 온 거는 그 애들을 주고 그렇게 좋은 일을 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허허허….” 웃으면서 “도둑질을 하는 놈 위에 또 나는 놈이 있구나.” (대중 웃음) 아니, 얼마나 그것이 기가 막힌 말입니까?

또 한 가지 요거, 잠깐만 얘기하죠. 우리 신도가 집이 없어서 남이 금방 지어 놓은 집을 빌려서, “팔릴 때까지 들어가 살아라.” 그래서 들어갔답니다. 집은 좋지만 그냥 자기는 보따리 보따리 해서 다락에다 넣고선, 내일 아침에 애들 학교 갈 때에 먹일 것도 없고 차비 줄 것도 없어서 엄마가 그냥 속상해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그 집이 좋으니까 도둑이 들어왔더랍니다. 하하하…, 뛰어넘어와 가지곤 다락을 통해서 방에 들어오려고 다락에 뛰어올라 갔는데, 거기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보따리 보따리만 있고 속을 풀어 보니까 헌 누더기, 뭐 이불 나부랭이 살림 나부랭이 뭐 이런 거거든요. 다락에서 도둑이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안에서 “아이, 내일 아침에 애들 밥은 어떡하며, 차비는 어떡하면 좋은가?” 하고 타령 소리가 들리거든요.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주인공, 당신만이 이 애들을 학교를 보낼 수 있고 당신만이 먹일 수 있겠다.”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이 도둑이 들을 때에 ‘주인공은 뭐고?’ 허허허…. 주인공은 뭔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에 당장 어린애를 보내지를 못하고 먹이지 못한다는 소리에 그만 이 도둑이 가슴이 좀 안됐다 이겁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첫 번째, 두 번째 해 가지고 와서 세 번째 들렀는데, 그 도둑질해 온 거를 다락문을 가만히 열고는 거기다가 내놓고서는 다락문을 또 타고 나가면서 하는 소리가 “아이구 참, 기가 막혀! 이것은 도둑질하러 들어왔다가 되뺏기고 가네!” 이러더랍니다. (대중 웃음) 그러니 도둑놈이 어찌 도둑놈만이겠느냐 이겁니다.

그 사람이 이튿날 아침에 와서 깔깔 웃으면서 “스님! 주인공이 이렇게도 살리는 수가 있습니까?” 하는 겁니다. 세상에 도둑이 도둑질한 걸 갖다 줘서 애를 무난히 학교에 보내고 쌀 한 가마니 사고 또 연탄 사고 애들 등록금도 주고 이랬다는 겁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 하니까 “그러게 도둑놈을 도둑놈으로 보지 마라. 모두가, 그저 죄가 뭐가 죄겠어? 다 모르는 게 죄고 순간순간 나오는 대로, 업식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거지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야. 그리고 그 환경에 닥치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도 많아. 그러니까 외려 더 불쌍하지. 뭐가 나쁘고 좋고가 따로따로 있겠느냐?”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악과 선은 없습니다. 허허허….


▲사회자: (법회를 마친 후 대중들에게) 감사합니다.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합장하시며) ‘성불이다’ 이런 생각, 이름을 붙이지 말고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다 공덕이 있으시길 빌면서….


※위 법문은 1992년 5월 3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행 스님 | 한마음선원장
2006-05-09 오후 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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