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누리에 찾아봐도 있는 곳이 없으나 / 두두물물(頭頭物物) 속에 본체가 드러나 있고 / 여러분 앞에 시종(始終)이 없는 빛을 놓고 있습니다.”
불기 2550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발표한 봉축법어 일부다. 이 법어를 ‘제대로’ 영역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열 손가락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영어로 쓰인 대표적인 세계불교사인 <불교 2500년사(2500 Years of Buddhism)>. 바파트(P.V.Bapat) 교수가 편찬한 이 책은 총 440페이지에 달하지만 한국불교사는 단 한 페이지 분량뿐이다. 한국불교를 외국어로 소개하는 노력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얘기다.
한국불교 세계화의 ‘기초’가 부실하다. 큰스님들의 법문 등 한국불교를 영어로 소개할 인적ㆍ물질적 토대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왜 이 같은 현실이 초래됐을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며 “언어 자체를 경계한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 특성 때문”이라는 진단만으로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前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법문집 등 불교 관련 영문번역일을 15년 이상 해오고 있는 브라이언 배리(국제포교사ㆍ조계종 국제사이트 자문위원)씨. 그는 ‘이중번역’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즉 한문투성이 법문을 사전으로 일일이 대조해 한글로 번역한 뒤 다시 영어로 번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성 스님(팔리문헌연구소장)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나 ‘마른 똥막대기(乾屎獗)’ 등 한국사람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법문을 번역하기엔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주장이다. 달라이 라마처럼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는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는 한 한국불교 세계화는 ‘이불 밑에서 만세 부르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불교용어 통일 미비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한 불교 전문 번역자는 “표준화된 용어가 없는 경우 스스로 만들어 쓴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관련 전문가들은 “그 동안 불교계에서 인재양성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공통적으로 내놓았다.
제대로 된 번역을 하기 위해선 영어 뿐 아니라 한문과 불교에 능통해야 하고 직접 수행을 체험해 보아야 하는데, 이러한 능력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종단 차원의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법회를 열고 있는 청아 스님(대전 자광사 주지)은 “종단 차원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계종 차원에서 해외 유학생 장학금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동국대 한국어 과정 외국인 스님들에 대해서도 장학금을 전액 지원하고 있지만, 번역과 관련한 보다 직접적인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계종 포교원의 한 관계자는 “영문학을 전공했거나 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초벌번역층 자체가 얇기 때문에 깊이있는 번역을 하기 위해선 교수불자회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제포교사회 김봉래 회장은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이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틀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외국에 유학했던 스님이나 재가불자가 아니더라도 친불교 성향의 인재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종단 차원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현재 <서장>을 영역화하고 있는 한성자(동국대 박사과정 수료)씨는 ‘종단 차원의 번역 전문 기관 설립’을 제안했다. 한씨는 “번역을 전담하는 인원 및 기관이 구성되면 결집할 공간이 마땅치 않은 인재들을 자연스럽게 조직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계종의 경우 현재 번역을 전담하고 있는 부서나 인력이 없다. 필요에 따라 부서에서 외부인력 등을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포교원 한 관계자는 “부처님오신날 이후 번역 전담 부서 및 인력 확정 등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