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중도와 화쟁정신에 길 있으니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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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는 ''양극화'' 이다. 소득격차에 따른 빈부 계층의 양극화에서부터 노령화와 저출산에 따른 연령대의 양극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현안문제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양극화이다.
포괄적인 만큼 그 의미하는 바도 다의적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경제적 지표 혹은 사회적 지표에 대한 분포도가 양쪽에 치우쳐 중간이 없는 상황을 양극화라고 한다. 또한, 대립적 두 의견이나 이념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대립적 상태로 있는 경우도 우리는 양극화라고 한다. 편의상 전자의 경우를 ''사회적 양극화''라 하고 후자를 ''사상적 양극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기원전 5~6세기 당시 인도 사회도 그 정도는 다르지만 양극화가 진행 중이었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철기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농업부문에서 비약적으로 생산이 증대 되었다. 잉여 생산물을 교환하기 위한 시장이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 되면서 자연히 도시가 형성되고 있었다. 잉여 생산물의 축적, 시장 그리고 도시의 형성은 곧 경제적 재화를 독점하는 계층의 등장을 의미했고 이에 따라 사회는 급박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당시 16개를 헤아리는 군소 국가들은 마가다 등 몇몇 큰 나라로 흡수 통합되는 과정에 있었다. 시장경제가 들어서면서 부의 쏠림 현상이 일어난 것도 한 원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철기를 이용한 무기의 등장은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를 더욱 더 심화 시켰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동족인 석가족이 멸망한 것도 이러한 과정에서였다.
종교적으로도 급박한 변화가 진행됐다. 카스트 제도에 기반한 브라흐만의 종교적 권위는 흔들리고 있었고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집을 떠나 숲에서 수행을 하였다. 이른바 사문의 등장 이었다.
‘추구하는 자’를 뜻하는 사문들은 일종의 자유사상가로서 기존의 브라흐마니즘에 안주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수행과 해탈을 위한 노력을 경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행 방식은 일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고행을 통해 해탈의 추구였다. 종교적으로 볼 때 브라흐만과 사문은 또 다른 양극화 현상이었다. 재가자로 집에 머물면서 제사 행위를 통해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한 끝 이라면 다른 한 끝은 육체적 고행을 통한 정신적 해탈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있는 자 없는 자 모두 ''고통받는 중생''
사회경제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그 시기에 부처님께서 어떻게 대처하셨는가 하는 것은 오늘날 양극화의 혼란 속에서 무엇이 불교적 해법인가를 찾는 우리들에게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부처님은 정치적 혹은 제도적 개혁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춘추전국 시대에 제자백가들의 주 관심이 정치적 제도적 개혁이었다는 점과 대조 된다. 일종의 정치적 무관심이라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이러한 대처방식은 이 후 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불교의 원천적 제약이며 한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보편적 구원을 지향하는 불교적 특징이자 장점이 된다.
부처님의 관심은 인간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리고 고통의 근원을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제도적 모순에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에서 찾았다.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최초로 제자들에게 전도를 명할 당시 모두 60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중 50명은 바로 야사와 그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장자''의 아들들로서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야사가 부처님께 귀의할 당시를 보면 야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빈곤으로 번민하고 있었고 부처님을 만나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교단에는 소위 당시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 계층이라 할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부처님께서 있는 자를 특별히 더 가까이 했거나, 반대로 없는 자이기 때문에 더 보살피는 경우는 없었다. 있는 자든 없는 자이든 왕이든 백성이든 부처님에게는 모두 ''고통 받는 중생'', 그야말로 평등한 존재들이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양극화의 고통을 주로 계층간의 갈등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양극화에 대한 검토와 그 해법의 과정이 계층간의 갈등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의 과정이어서는 안 된다.
사회 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직접적인 불교적 해답은 없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점은 불교의 한계이다. 하지만 불교적 메시지는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고통, 그리고 욕망의 악순환 구조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의 보편적 고통과 욕망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어떠한 사회경제적 해법, 제도적 보완도 또 다른 악순환의 시작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불교에 사회 변혁의 이론이 없다고 해서 불교가 사회에 관심이 없다든가 역사적 관심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교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사회적 정치적 모순으로 인한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소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영원한 자유가 보장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가 보다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사회현상적인 문제보다는 ''우리의 관점''과 ''생각하는 방식''에 관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한 사회의 이념적 혹은 사상적 양극화 해소에 어떤 다른 종교 사상보다 장점이 크다.
기존 이론 뛰어넘어 새 길 여는 것이 중도
불교의 중도와 화쟁 사상은 이러한 사상적 이념적 양극화 해소에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중도와 화쟁은 둘 다 공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철학적 뉘앙스와 지향점에 차이가 있다. 중도가 부정을 통한 두 대립적 관점의 해소에 그 지향점이 있다면 화쟁은 개시개비(皆是皆非)의 양긍정과 양부정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이해하려는데 지향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화쟁은 다원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문제에 보다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중도란 두 대립적 관점이 결국 ''상대성''에 기초해 있음을 이해하는 인식론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락중도(苦樂中道), 단상중도(斷常中道)의 경우와 같이 기존의 통용되던 이론들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제 3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이론이나 주장들을 적당히 조합하여 혹은 절충하여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열고자하는 것이 바로 중도이다. 그래서 중도는 어떤 고정된 견해가 아니라 자기 부정을 포함하는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바른 길에 도달하고자하는 모색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화쟁은 ‘장님 코끼리만지기’의 예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시개비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옳다는 긍정과, 다른 사람도 틀렸지만 나도 틀렸다는 부정을 통해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환경문제를 비롯하여, 자유무역협정, 그리고 남북문제 등등 많은 현안들이 산적해 있으며 온갖 주장들과 함께 사안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이합집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이념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새로운 해결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중도의 가르침과 화쟁 정신의 실천이 절실하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할 중요한 점은 중도와 화쟁은 그 자체 어떤 해결의 결론이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요 전략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중도와 화쟁은 가장 불교적인 사상이면서 동시에 범종교적인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적 사안만이 아니라 양극화와 같은 사회 일반의 사안이나 다종교적 사안에도 적용될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양극화는 곧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사회가 나뉘는 것을 말한다. ‘가진 자’야 세상살이가 편하겠지만 ‘못 가진 자’들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빼앗긴 채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절망에 허덕인다. 이렇게 극단으로 나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부처님 말씀대로 본다면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모두가 형제요, 친구다.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들어본다.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살아도 서로 잘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우정이 생기지 않는다. 진정한 생활 공동체에는 그 자체를 밝혀주는 신념과 지혜가 있어서 사람들이 서로 믿고 화합한다. 진실한 화합이야말로 진정한 생활공동체나 한 조직체의 생명이다. <대반열반경> ▨네 가지 계급(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으로 그 사람의 우열을 규정할 수 없다.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이다. 무릇 네 종족 가운데 어떤 사람이든지 비구가 되고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없어진 사람을 가장 뛰어난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함경> ▨좋은 벗이란 고락을 함께 하고 이익을 분배하고 상대방에게 직업을 갖게 하고 늘 어진 생각을 함이다. <선생자경> ▨어떤 것이 고인가? 이른 바 빈궁이다. 어떤 고가 가장 중한가? 이른 바 빈궁고이다. 사고(死苦)와 빈고(貧苦)는 다름이 없나니, 차라리 사고를 받을지언정 빈궁고는 벗어나야 한다. <금색왕경> ▨온갖 중생의 평등이 온갖 존재의 평등과 어긋나지 않으며, 온갖 사물의 평등이 온갖 중생의 평등과 어긋나지 않는다. < 화엄경>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은 곧 나를 돌보는 것이다. 나는 천상에서나 인간에서나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보다 더 훌륭한 베풂을 보지 못했다. <증일아함경> ▨나라에 외로운 이나 늙은 노인이 있거든 물건을 주어 구제하고, 가난하고 곤궁한 자가 와서 구걸하거든 거절하지 말라. 정법으로만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치우치거나 억울한 일이 없게 하라. <장아함경> ▨마땅히 자애의 마음으로 어린애들을 양육하며, 금수·벌레·천인(賤人)중 살려 주기를 바라는 자를 보았을 때에는 언제나 가엾이 여겨 뜻대로 먹어 편안함을 얻게 해야 한다. <아난사사경> ▨베풂은 중생을 위한 복의 그릇이요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이니 누구라도 보시의 공덕을 생각하거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내라. 베풂은 널리 평등하게 골고루 하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아야만 베푸는 마음속에서 나를 만나 구제받는 인연을 맺으리라. <증일아함경> ▨온갖 존재는 실체가 없고 평등할 뿐이다. 만약 온갖 존재에서 안팎을 구분한다면, 이는 마음에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떠나 별개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비밀상경> ▨배고프고 궁핍한 중생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에게 의식(衣食)에 대한 궁핍을 없게 하겠다는 서원을 일으키는 것이 보시바라밀을 닦는 마음이다. <대품반야바라밀경> ▨지도자가 법답지 못하면 아래 사람들도 모두 법답지 못하게 된다.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왕의 법이 옳지 못한 때문이니라. 소떼가 강물을 건너갈 때 길잡이 소가 길을 바로 가지 못하면 뒤따르는 소들이 물에 빠지는 것처럼. <증일아함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