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서울 근교의 낯선 건물 앞.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진관 스님은 이날 누구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이날은 ‘사형제폐지불교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진관 스님에게도 각별한 날이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관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으로는 처음으로 5월 1일 오후 3시 서울구치소 강당에서 사형수 5명에게 계를 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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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열린 이날 수계법회의 전계대화상 지관 스님은 “죄라는 것은 본래 없고 죄짓는 마음이라는 것도 본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한번 잘못 일으키면 죄고 된다. 알고 저지르던 모르고 저지르든 늘 참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씻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이 살아가라”며 이들을 격려했다.
고씨와 함께 지관 스님으로부터 5계를 받은 사형수는 ‘덕륜’ ‘정광’‘법수’‘정암’이다. 38세부터 51세까지 다양한 나이의 이들은 옥색 수의와 붉은색 수인번호가 아니면 한없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한때 타인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흉악범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얼굴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형수를 이곳에서는 ‘최고수’라 부른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붉은 패찰에 수인번호를 세기고 언제일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존재의 이유인 사람들이다. 삶과 죽음이 혼재된 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데 종교는 매우 큰 역할을 한다. 국내에 수감중인 사형수 63명 중 57명이 범행 당시 무교였지만 현재는 개신교 32명, 가톨릭 18명, 불교 10명, 기타 종교 1명 등 61명이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이날 지관 스님으로부터 “무명구름이 걷히면 맑은 달이 비칠 것”이라며 ‘수월’이라는 법명을 받은 고병수(가명ㆍ41)씨는 7년 전 이곳에서 진관 스님과 처음 만났다. 한눈에 봐도 건장한 체구의 고씨는 평범하고 맑은 인상이지만, 한때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을 해친 폭력범죄자다.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서울구치에만 2번 수감된 전력을 가진 진관 스님은 당시 사형수 고씨를 불교에 귀의하게 만들었다. 같은 사동에 있던 스님은 출소하던 날 새벽 조용히 고씨가 수감된 방에 염주와 불서를 전하고 사라졌다. 그 뒤로 인연은 계속됐고 지금 스님은 사형제폐지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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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 스님은 “부처님은 모든 만물이 한 몸으로 귀하다 가르쳐 주신 분이다. 지난날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는 이들 만큼 선한 사람들이 없다. 당장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고씨는 얼마 전 방송통신 과정으로 ‘포교사고시’과정을 마쳤다. 손재주가 남다른 그는 요즘 불화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감옥 안에서는 마땅한 재료가 없어 말린 오징어에서 나온 대나무 작대기를 조각칼 삼아 비누를 깎아 불상도 만든다.
“만약 사회로 다시 나갈 수 있다면 평생 절에서 일하고 싶다”는 고씨는 “수형자들에 대한 불교계 관심이 상대적으로 너무나 미약하다”며 아쉬워했다.
“이 안에서도 ‘지범개차(持犯開遮)’를 따져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구분이 엄격하다”며 “불교를 믿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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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가 밝힌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1998년 이후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없지만 최소한 63명이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1998년부터 비공식적인 사형의 모라토리엄(동결)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앰네스티는 최근 한국 국회에서 사형제 폐지를 위한 특별법이 검토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지난달 9일 현재 2명의 장기수를 포함한 4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복역 중이라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현재 1977년 16개국에 불과했던 사형제 폐지 국가는 지난해 86개국으로 증가하는 등 전세계적으로 사형제 폐지가 확산되고 있다.
한편, 이날 수계식에는 조계종 사회부장 지원 스님, 호법부장 도진 스님, 종회의원 종광 스님, 주호영ㆍ김문수 한나라당 의원, 변덕륜 교정인불자연합회장, 강보원 서울구치소장, 이형구 의왕시장, 김임숙 불교여성개발원장, 조계사 합창단 등 사부대중 200여명이 참석했다.